25. 11. 29 SAT
요즘 번아웃 증상을 느끼고 있다. 공부를 계속하려고 했는데, 일주일간 단순 '하기 싫음'이 아니라 '못하겠음'에 가까운 느낌을 받아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소진됐다는 생각이 들면 늘 영화관으로 간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가서 2시간 정도 있다가 오는데, 영화가 보고 싶은 것보단 잡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 가는 편이다.
오늘은 주토피아2를 보러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토요일 오후에 아무도 없는 경우는 처음이라 순간 영화관이 망했나, 싶었다. 알고 보니 비슷한 시간대에 초등학생들은 모두 더빙판을 보러 간 거였다. 난 자막이었고.
다음 경로는 서점이나 도서관이다. 서점에 가면 2026년 다이어리, 각종 문구류에 시선을 빼앗길 거 같아서 오늘은 도서관으로 택했다. 모든 게 빠른 현대 사회에서 책만큼은 느린 시간을 추구한다는 게 매력적이다. 사실 지친 상태에선 글이 잘 안 읽히기에 '책 제목만 보다가 오자'는 생각으로 간다.
책 제목은 작가가 담은 내용의 첫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가장 고민을 많이 하는 부분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제목을 꽤나 관심 있게 보는 편이다. 책장엔 각각의 제목이 모여 또 다른 거대한 책을 구성하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닉주디도, 찌그러진 오리에게 사랑 고백을 한 독자도 참 사랑스러웠다.
저녁엔 작은오빠와 통화를 했다. 1년간 자취방에서 같이 코딩을 하던 경험과 성취욕구와 미래에 대한 생각이 비슷해서 대화가 잘 통한다.
오빠는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다. 예의, 타인을 이해하는 시선,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태도, 수용하는 자세, 가슴 뛰는 꿈을 가지고 있는 열정 등 장점이 많은 사람이자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해 준 사람이다.
오빠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단약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부모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재수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오빠의 영향이 컸다.
그 누구보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믿어줬고 응원해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즘 나 번아웃이 왔나 봐, 근데 그럴만해. 여름부터 쉬지 않고 달렸으니까.
- 그치. 당연히 지치는 순간은 와. 쉴 땐 제대로 쉬고, 할 땐 제대로 하면 돼. 지금까지 해왔으니까 충분히 다시 할 수 있을 거야.
음.. 맞아. 사실은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변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1년 전이랑 비교하면 정말 많이 바뀌었다.
- 그니까. 근데 모든 건 네 선택으로 만들어진 거야. 네가 공부를 하기로 선택했고, 습관을 만들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바뀔 수 있었던 거지. 그래서 네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같은 환경에서 10~13시간씩 꾸준히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노베이스에서 4개월 만에 3등급 이상씩 올렸잖아. 예전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장동선 뇌과학자에게 질문하는 모습 보면서도 성장과 성공에 대한 잠재력이 있다는 걸 느꼈어.
근데 그거 기억나? 오빠가 여름에 나보고 증명하라고 했던 거.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라고 했던 그 말이 엄청 동기부여가 돼서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어.
- 응, 기억나네ㅋㅋㅋ 사실은 그땐 좀 못 믿었거든. 근데 지금은 내가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성장해서 놀랍다. ‘예전 기억이 지워졌나?’ 라는 생각도 했었다니까.
이젠 더 중요한 게 생겼으니까~
내가 변하고 있다고 느낀 결정적인 순간이
과거의 나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들 때였어. 하루하루 벅차던 그때의 나를 다시 직면하고 싶지 않더라고. 그래서 평소에 루틴을 지키고, 힘들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미리 생각했거든. 무너짐에 대한 불안감이 오히려 성장의 원동력이 된 거지.
- 아.. 나는 항상 미래만 바라보며 바뀌려고 노력했는데, 넌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뀌려고 노력한 거네. 그동안 나는 힘든 과거는 늘 지우려고만 했었는데, 오늘 또 하나 배웠네. 나도 생각 좀 해봐야겠다. 그리고 요즘에 제일 놀랐던 건 네가 "힘내"라는 말을 자주 하더라? 예전에 힘내라는 말은 금기어였는데, 저번에 나한테 힘내라고 말하길래 충격이었어.
ㅋㅋㅋㅋ 충격받을 정돈가? 아 근데 그땐 힘내라는 말이 그렇게 싫더라. 딱히 응원해 줄 말이 없어서 하는 말인 걸 알면서도 '힘을 낼 수 없어서 이러고 있는데 힘내라고??'라는 생각이 들었어. 흠.. 많이 부정적이긴 했네, 미안ㅎㅎ 그래도 요즘엔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고, 다정함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해. 내가 받았던 말들이 지금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줬다는 걸 느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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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와 통화를 하며 그동안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잊은 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고유함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포텐셜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
삶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어떤 두려움도 꼭꼭 소화할 용기가 생긴다.
종종 외롭고, 무기력한 순간이 오지만
다시 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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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인생은 항상 신발끈이 풀려 넘어지는 것처럼 고난과 역경들이 많지만, 우리는 항상 신발끈을 묶어야 합니다. 완벽하게 묶을 수 없어 또다시 끈이 풀리기 마련이지만, 다시 운동화 끈을 묶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언제나 운동화 끈을 묶을 수 있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