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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r O Nov 02. 2024

연(然)과 연(緣)

 귀찮음을 이겨내고 순댓국을 먹으러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덕분에 계획에는 없었지만 전부터 눈여겨보던 위스키도 할인가에 득템했고, 마침 전부터 맛보고 싶었던 소꼬리 찜 가게가 가까워 포장도 해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노량진 수산시장을 지나 올림픽대로를 타기 위해 차선을 하나씩 파고들던 그때 핸드폰 화면에 결코 잊히지 않는 번호 하나가 뜬다.


 “여보ㅅ..”

 “천천히 끼세요, 천천히.”


 1년 만에 듣게 된 그의 목소리이지만 어색함이나 긴장감이라곤 없다. 장난칠 때마다 능청스레 존댓말을 쓰던 버릇까지 여전하다. 사이드미러를 자세히 바라보니 익숙한 차량번호가 비친다. 어지간해서 끝 차선 주행은 잘 안 하는 사람인데 그날따라 무슨 연유로 4차선을 타고 있던 걸까.


 “왜 거기 있어?”

 “그러는 당신은 왜 거기 있는데?”


 자기 갈 길 가던 사람에게 왜 거기 있냐니. 당황스러운 상황에 아무 말이 아무러하게 나와버렸다. 어리벙벙한 와중에 비상등으로 고맙다는 표시를 한다. 수화기 너머로 ‘당신답다’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뒤에서 에스코트해줄 테니 안전 운전하라는 당부의 말에 들이받으려고 따라오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던진다. 나 역시 그 사람 못지않게 편하고 자연스럽다. 어떠한 계산이나 긴장 없이 누군가와 대화를 해본 게 언제였더라.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의 시간 중 딱 그 타이밍. 많고 많은 지역 중에서도 서울, 그것도 한강을 가로지르는 32개의 다리들 중 딱 그곳. 이별한 우리가 마주하게 된 건 어쩌면 ... 생각하던 찰나, 오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 자리에 그 시간에 꼭 운명처럼 우리는 놓여 있었던 거죠.'




 유난히 옆자리에 앉은 과장님의 칭얼거림이 거슬린다. 사이가 좋지 않은 남편,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사춘기 아들들과 함께 사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매일같이 하소연하던 그녀였지만 유독 심한 날이다. 가뜩이나 꼬여버린 업무 탓에 오전 시간을 홀라당 날려먹고 욕은 욕대로 먹어 입맛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점심까지 걸러 기력도, 기분도 전부 다운되어 버렸다. 퇴근 후 그와 함께 맛있는 음식과 쌉쌀한 소주 한 잔으로 이 날을 털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옆자리의 그녀처럼 나의 우울함이 그에게 옮을까 두려워 오늘의 기분만큼은 꺼내놓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나의 날이 지친 하루였음을 티 내지 말아야 한다.’ 다짐한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놈은 아주 얄궂은 친구라서 감추겠다고 작정할수록 더 자신의 존재감이 도드라지길 원하는 듯하다. 한 잔, 두 잔 기울이다 보니 파묻기로 했던 울적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틀어막고 있던 감정들이 비집고 나오더니 서서히 틈을 벌리고 터져 나온다. 결국 우리의 저녁 식사는 나의 투덜거림이라는 상보로 덮여 차갑게 식어간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 온기가 사라진 밥상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란 사람은 표리부동한 자라서 겉으로 단단해 보이길 원하지만 사실은 나약하고 굳세지 못한 탓에 상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것과 달리 그 기대는 질책과 침묵이 되어 돌아온다. 소란한 테이블들 사이 그와 나만 고요하다.


 드르륵, 가게 미닫이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다. 비 내리는 겨울밤의 찬 공기가 훅 하고 들어온다. 냉기로 시린 탓인지 왈칵 눈물이 차오르지만 눈꺼풀 아래에 걸쳐두고 떨어지지 못하게 애쓴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내가 앞서 걷는다. 쏟아지는 비를 우산으로 막으며 그는 내 뒤를 따른다. 우산이 없는 사람과 우산이 있는 사람이 나란히 신호를 기다린다. 횡단보도 바로 옆 코인노래방에서 누군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 말을 참았다면 다른 얘길 했다면 우린 이별을 피해 갔을 것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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