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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렁뚱땅 도덕쌤 Sep 29. 2024

당연한 것이 당연해지도록

"도덕을 4년이나 배워요?" 대학에 다니는 동안, 이 질문을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르겠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스무 번은 넘을 것이다. 스무 번 넘게 각기 다른 사람들과 반복했던 대화를 구체적으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정확히 이렇게 반복된다.


- 무슨 과 다녀요?

- 윤리교육과요.

- 물리교육과?

- 아뇨, 윤리요. 도덕선생님 되는 과예요.

- 도덕을 4년이나 배워요?


이렇게 묻는 사람들에게 악의는 없다. 그 질문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공교육을 받았고,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웠던 도덕이란 과목의 인상에 기초해서 순수한 의문을 품은 것이다. 그 쉬운 과목을, 대학에서 4년동안 전공한다고? 배울 내용이 있나?


"도덕을 4년이나 배워요?"의 자매품으로 이런 말이 있다. "도덕 시험은 착한 거 고르면 정답이다." 수업을 집중해서 듣거나 교과서를 달달 외우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상식에 기초해서 착해보이는 선지를 선택하면 그게 정답이라는 얘기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도덕이란 과목은 그런 과목이다. 당연한 소리, 쉬운 소리, 모두가 아는 소리.


20살의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도덕이 배울 게 있냐는 질문에는 철학의 한 분과인 윤리학을 배운다고 대답했고, 나중에 교사가 되면 시험문제를 어렵게 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만약 누군가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하하하, 도덕은 쉬운데, 도덕교육은 어렵더라고요."


물론 윤리교육과에서 철학의 일부를 공부하는 것은 사실이다. 고등학교에서 '윤리와 사상'이나 '생활과 윤리' 과목을 배운 사람들은 짐작할 수 있는, 그런 내용. 윤리학은 적어도 다른 학문들만큼은 어려운 학문이다. 여러 도덕적 선택지가 충돌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지, 선이나 행복같은 단어들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지, 사람의 본성은 선한지 악한지 등등을 놓고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배운다. 윤리학계에서 합의된 이론도 있지만 합의되지 않은 이론도 많아서, 학부 수준에서는 대체로 '누구는 이렇게 말했고 다른 누구는 저렇게 말했다' 하고 외우는 공부를 한다.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이런 공부는 도덕교사로서 근무하는 데에 필요하다. 고등학교에서 앞서 말한 두 과목을 가르칠 때는 물론이고, 중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칠 때도.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는 철학자의 사상은 커녕 이름도 별로 나오지 않으니, 내 말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학생에게 1을 가르치기 위해 교사는 100을 알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어느 과목이든, 교과서보다 더 넓고 깊게 알아야 교과서 내용을 매끄럽게 수업할 수 있다. 도덕도 마찬가지. 1년동안 입밖으로 내지 않을 이론이라 해도, 머릿속에는 있어야 수업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자유와 자율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자율에 대해 가르칠 수 있을까? 자유와 자율을 비교히는 단원은 없지만, 자율이란 단어는 교과서에 반복해서 나온다. 정확하게 알아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몇몇 도덕선생님들은 대학에서 배운 어려운 내용을 중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한다. 단정할 순 없지만, 그 마음 안에는 도덕 과목이 쉽고 뻔하다는 인식에 대한 반발심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내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분들께 동의하지 않는다. 도덕은 이미 어려운 과목이기 때문에.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


도덕은 이론을 달달 외우기 위한 과목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과목이지. 도덕 시험이 좀 쉬우면 뭐 어떤가. 어차피 이 과목의 목표는 시험을 잘 치는 게 아닌데.(물론 평균이 너무 높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지침인지 관습인지 모를 무엇이 있는 듯하기 때문에 조금은 이론적인 내용을 시험에 넣어야 한다.) 시험을 100점 맞았어도 그 내용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학생은 학습목표 미도달 학생이다. 물론 그 미도달이 생활기록부에 적히지도 않고 점수가 매겨지지도 않고 보충수업을 받지도 않지만, 그래서 학생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그래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시험 점수가 아니라 행동과 삶이다.


"도덕 시간에는 당연한 것만 배워요" 라는 말이 이제는 은근히 기쁘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다니! 사회의 정설이라니! 모두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다니! 윤리와 사상 시간에 성선설 성악설을 가르치면 의대지망생이 나타나 "인간 유전자에는 선악이 적혀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나날을 겪다가 중학교에 오니 꿈만 같다. (그 의대지망생에게는 '밀물 썰물을 윤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선악은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단다'라고 답했는데,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도덕이 쉽다고 하면 이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당연한 걸 너는 왜 안 지키니?


중학교 도덕교사는 아이들이 그 당연한 것을 실천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도덕적 딜레마 상황도 가르치면 좋겠지만, 살면서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삶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이 도덕적 선택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그걸 실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기로에 놓일 뿐. 또한, 사랑이나 성실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도 알면 당연히 좋겠지만, 사랑이 뭔지 세세하게 언어화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사랑을 해낼 수 있다. 도덕과 비도덕의 기준선을 정확하게 긋지 못해도 괜찮다. '누가 봐도 비도덕적인 행동'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니까. 누가 봐도 비도덕적인 행동은 하지 않고 누가 봐도 도덕적인 행동은 실행하기, 이 말은 당연해보이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예를 들면, 나만 해도 북극곰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 에어컨을 펑펑 튼다. 중학교 교사의 임무는, 나도 못 하는 이 어려운 일을 아이들이 해내도록 돕는 것. 중학교 교사의 목표는, 아이들이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당연하게 행동에 옮기는 것. 그래서 언젠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진 사회를 만드는 것.


그렇다고 해서 도덕교사가 심리학이나 발달론, 혹은 수업 기법만 알면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 철학적 기초가 있어야 당연한 것들이 왜 당연한지 설명할 수 있으니까. 수업은 대부분 말과 설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정서적 측면을 고려하고 각종 학습활동을 한다 해도 논리적 설득의 작업이 빠질 수는 없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기상천외한 질문에 적절한 답을 쉽게 풀어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각종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철학 사상을 줄줄 늘어놓는 것이 도덕수업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도덕수업의 목표니까. 비유하자면, 도덕수업은 논문보다는 광고지에 가깝다. 여러분, 도덕적 삶 한번 구매해 보세요!


언제부터인가 내 교육 모토는 “말보다 삶으로 가르치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말을 많이 하지만, 나는 작가도 아니고 강연가도 아니다. 작가와 강연가는 언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 도덕교사는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나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이 줄 수 있는 도움은 무엇일까. 쓰기는 작가에 못 미치고 말하기는 강연가에 못 미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작가나 강연가와 달리 교사는 학생들과 삶을 공유하지. 책이나 무대에서만 청자를 만나는 사람들과 달리 교사는 청자와 함께 생활하고, 사소한 행동도 다 드러나지. 그럼 교사만 할 수 있는 일은, 본받을 만한 어른이 되는 것 아닐까? 본받을 만한 삶을 보여주는 것.


본받을 만한 동시에 본받고 싶은 삶이란 아마도 바르고 행복한 삶일 것이다. 바르기만 하고 불행하면 본받고 싶지 않고, 바르지 않고 즐겁기만 하면(바르지 않은 사람의 즐거움은 행복이 아니라고 믿는다) 잘못된 본이 된다. 그래서 적어도 학생들 앞에서만큼은 바르고 행복한 사람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학생들이 바로 변화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교사로서 학생들 앞에 설 때는 부끄럽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윤리학을 공부하고, 삶의 기준을 세우고, 나를 다잡으면서. 모르는 것은 질문하고, 잘못한 것은 사과하고, 에어컨 온도는 살짝 높이면서.


물론 나는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완벽해지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윤리학을 공부하고 수업을 연구하고 도덕적 본보기가 되려고 노력해도 우리는 모두 한낱 인간일 테니까. 하지만 불완전한 내가 불완전한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서로를 더 도덕적으로 성장시키는, 이런 나날들은 도덕교사가 아니었다면 못 살아봤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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