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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렁뚱땅 도덕쌤 Sep 15. 2024

선생님 서울대 나왔어요? 근데 왜 이런 데 있어요?

학생들로부터 자주 듣는 질문이다. 서울대 나와서 왜 이런 데 있어요? 질문의 초점은 ‘서울대’에 있겠지만, 내 귀에는 ‘이런 데’만 맴돈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이런 데’구나. 내 직업과 내 직장이,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보잘것 없구나. 이유를 짐작해본다. 연봉이 높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일이 힘들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어서? 이런저런 요소들을 떠올리다보면 괜히 초라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런 세속적인 기준에 맞춰 살아갈 만큼 영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기준들을 모두 무시하며 살아갈 만큼 강단있지도 못한 사람. 그 어정쩡한 사람이 바로 나니까.


한 번은 물어봤다. 왜인 것 같아? 그랬더니 들려온 대답이 글쎄,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니까요.” 내 그릇이 작다는 의미였다. 맙소사. 다음 날, 그렇게 말했던 아이에게 긴 편지를 써서 건넸다. 그리고 다시는 “왜인 것 같아?”라고 학생들에게 되묻지 않았다. 내 그릇이 작긴 작은가 보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 만나려고 그랬지~” 그러면 아이도 웃고 나도 웃고, 빠르게 넘어갈 수 있다. 시간이 좀 더 있을 때는 이렇게 대답한다. “서울대생을 1년에 몇 명씩 뽑는 줄 알아? 3천 명이야. 엄청 많지? 서울대생 별 거 아니고, 서울대 나왔다고 다 부자되는 거 아니더라.” 시간이 아주 많을 때는 일장연설을 하기도 한다. “하루가 24시간인데 성인 권장 수면 시간이 8시간이야. 그러면 16시간이 남는데, 한국인들은 보통 8시간 넘게 일해. 그러면 자는 시간 빼고, 일하는 시간이 길어 노는 시간이 길어? 일하는 시간이 길지? 나는 돈을 많이 벌어서 노는 시간이 행복한 것보다 돈을 덜 벌더라도 일하는 시간에 행복하고 싶어. 그러면 인생에 행복한 시간이 더 길잖아.”


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학교는 ’이런 데‘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교육과정에선 없어졌는데, 선생님이 중학교 2학년일 때 도덕책에는 직업의 의의가 3개 적혀 있었어. 자아실현, 생계유지, 사회봉사. 직업은 생계유지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나는 너희도 자아실현과 사회봉사를 고려해서 직업을 선택하면 좋겠어. 생계유지만 생각하면 직업을 연봉순으로 쭉 줄세울 수 있지. 하지만 사람마다 좋아하는 게 다르고 잘하는 게 다르잖아. 어떤 직업을 가졌을 때 자아실현과 사회봉사를 더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 나한테는 그게 교사였어. 너에게는 또 다른 무엇일 거야.” 이렇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이 말이 아무에게도 와닿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뭐 어때서? 라고 되묻지 않는 이유도 같다. 나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테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어정쩡한 사람이다. 연봉은 한낱 숫자에 불과하다고, 사람의 가치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속으로는 누가 그 숫자들 때문에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입으로는 학벌주의에 반대하면서도 불리해지면 서울대 세 글자를 슥 흘린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제목을 이렇게 쓰면 조회수가 올라갈지 궁금해한다. 이렇게 찌질할 수가.


“내가 지금 서른한 살인데, 서울대 입학은 열아홉 살에 한 거잖아. 열아홉 살에 이룬 성취를 서른한 살까지 자랑하는 사람은 정말 못난 사람이야. 열아홉 살 이후로 자랑할 만한 일을 하나도 못 했다는 거니까. 할머니가 돼서 젊을 때 예뻤었다고 자랑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 내 자랑은 서울대가 아니라 너희들이지.” 자주 하는 말이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들은 정말 내 자랑이고 내가 이룬 가장 멋진 성취다. 하지만 나는 열아홉 살에 이룬 성취를 서른한 살까지 자랑하는 못난 행동을 멈추지 못했다. 마음 속으로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은데도 입으로는 계속해서 자랑한다. 왜냐면 아이들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고, 세상은 숫자만 읽으니까.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나의 장점과 성취들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 숫자가 아니다. 학생들의 작은 변화, 어릴 때부터 지켜온 신념, 어렵게 용기를 냈던 경험 등등. 내가 진정 자랑하고 싶은 것은 그것들이지만, 나는 결국 서울대 졸업증명서 따위를 자랑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는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이런 데‘가 아니다. 교사 생활이 나에게 주는 보람과 행복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삼키고 세속적 기준을 살피곤 한다. 결국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세상의 눈치를 보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흔한 말이고 맞는 말이지만 동시에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건 아무도 학교를 ’이런 데‘라고 부르지 않는 세상이다. 숫자로 줄세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인정받는 세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외치고 실천해야 한다. 학교의 가치를 숫자로 검증하는 일을 멈추고, 세상 어떤 직장도 ’이런 데‘라고 불려선 안 된다고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내 직업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할 때, 소위 ’스펙‘을 쌓은 누군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나는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할 때, 나는 허둥지둥 학벌을 꺼내 든다. 진짜 초라한 건 스펙이 없는 내가 아니라 스펙을 전시하는 나라는 걸 알면서도.


언제쯤 ’왜 이런 데 있냐‘는 질문에 의연할 수 있을까. 언제쯤 내가 선택한 내 직장이 ’이런 데‘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이 박수쳐 주지 않더라도 내 길을 걷겠다고 아주 오래 전에 결심했고, 그 결심을 지키고는 있다. 하지만 언제쯤 이 길을 걸으면서 주위를 힐끔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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