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윤리를 배우면 도덕성이 발달할까? (‘생활과 윤리’는 고등학교 교과목 이름입니다. 선택과목이기 때문에 배우는 학생도 있고 배우지 않는 학생도 있습니다. 흔히 ‘생윤’으로 줄여 부릅니다.) 2021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생활과 윤리를 배우고 있었던, 그리고 윤리교육과 진학을 희망하던 제자가 통계 수업에서 설정한 탐구 주제다. 그 주제로 직접 설문조사를 하고 통계를 돌리고 탐구보고서를 작성했다. 물론 고등학생 수준에서 진행한 연구니까 한계가 많았겠지만, 나름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님 이름으로 나온 설문지까지 인터넷에서 구해서 온 학교에 돌렸다고 한다. 이렇게 열심히 완성한 탐구보고서를 (나는 통계 수업 선생님이 아니지만 제자에게 부탁해서) 받아 읽었다. 나는 통계를 잘 모르지만 보고서의 결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생활과 윤리 선택’과 ‘도덕적 삶’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음.
연구 계획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결론이 이럴 거라고 100퍼센트 확신했으나, 구체적인 수치를 눈으로 확인하니 어쩐지 데굴데굴 구르며 웃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박장대소를 하는 내 앞에서 제자는 시무룩해졌다. 들어보니, 제자는 높은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 실험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과연 윤리교육과 지망생. 그렇게 예상해 준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 반대 결과를 예상했던 나를 돌아보게 됐다. 그 다음 순서는, 제자들의 도덕성을 전혀 발달시키지 못한 나의 생윤 수업에 대한 반성. 그렇다. 그 문제의 생윤 수업을 맡은 교사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왜 가르치고 있는 걸까?
1940년에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다 보면 굉장히 인상적인 번역이 있다. (디즈니플러스에는 1940년으로 나오는데 네이버검색에서는 1963년으로 나온다.) 영화 초반부, 파란요정이 처음 다녀가고 피노키오가 이제 막 말을 하기 시작한 밤, 제페토 할아버지와 피노키오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 Now, close your eyes and go to sleep.
- Why?
- Oh, everybody has to sleep. Figaro goes to sleep, and Cleo. And besides, tomorrow you’ve got to go to school.
- Why?
- Oh, to learn things and get smart.
제페토 할아버지의 마지막 대사, “to learn things and get smart”는 한국어로 이렇게 적힌다.
- 학교에서 배워야 훌륭한 사람이 된단다.
아마도 아주 어릴 때 마지막으로 보았을 영화 ‘피노키오’를 스무 살에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이 자막이 나를 사로잡았다.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내일은 학교에 가야지. 왜요? 학교에서 배워야 훌륭한 사람이 된단다. 1940년의 애니메이션 속 대화가 꼭 2013년의 나를 깨우치기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나는 학교에 왜 갔더라? 어떤 어린이가 나에게 학교에 왜 가야 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지? 교사가 된 후에도 종종 그 대화를 떠올리게 됐다. 멍하니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노트북을 들고 교실까지 걸어갈 때 등등. 누군가 내게 학교에 왜 가야 하냐고 묻는 순간에 떳떳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그야 학교에서 배워야 훌륭한 사람이 되니까요, 그렇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실제로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 곳이어야 했다. 훌륭하다는 게 무엇인지 그 정확한 답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사람을 입학 전보다 비겁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곳은 아니어야 했다. 학교를 그런 장소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성공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데 왜 번역을 굳이 저렇게 했을까? 한국어 전통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표현은 주로 인격이나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영어 단어 smart와는 너무나 다른 말이니, 의역을 넘어 오역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겠다. 한국인들은 학교가 고작 smart한 사람을 만드는 장소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실제로 학교가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든 아니든, 아무튼 학교란 응당 그런 곳이어야 하니까. 아마 번역자도 한국인이었을 것이고,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가 고작 smart해지기 위해서라는 그런 문장을 차마 자기 손으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건 한국인 감수성에 맞는 문장이 아니니까. 게다가 어차피 저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왜요?”를 쏟아내는 피노키오지, 제페토 할아버지의 구체적인 대답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인다운 문장으로 대사를 바꿔치기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닌가, 상상해본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한국어 더빙은 “학교 가서 공부를 해야 똑똑해지는 거야”로, 영어 대사와 다르지 않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제자의 통계 보고서는 자막 “학교에서 배워야 훌륭한 사람이 된단다”의 반증 사례가 아니다. 제자의 설문조사 대상은 모두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으니까. 피노키오의 자막이 사실인지 아닌지 보려면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과 다니지 않는 청소년을 비교해야 한다, 학교가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어느 과목을 선택하건 모든 학생이 훌륭해지고, 그 때문에 생윤 선택이 사람의 도덕성에 차이를 만들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가설을 세워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학교도 생윤도, 사람을 훌륭하게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금 한국어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한국인이고, 아마 이 글을 읽을 사람들도 모두 한국인일 것이다. “학교에서 배워야 훌륭한 사람이 된단다”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하지만 참이어야 한다고 믿는 한국인. 자막을 넣은 번역가도, 그 의역을 불편함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도 모두 그렇게 믿는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믿음에 걸맞게 학교를 바꾸는 일이다.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 장소로. 그럴 수 있을까? 나 혼자 전국의 모든 학교를 바꿔내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꿈을 꿔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꿈을 이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학교에서 배워야 훌륭한 사람이 된단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생활과 윤리를 선택하면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된단다. 어른들이 학교를 그런 곳으로, 생활과 윤리를 그런 과목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안심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