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단위 자사고에서 기간제 교사를 할 때, 학생들의 교칙 위반을 많이 눈감아 주는 선생님이 있었어요. 학생들은 모두 그 선생님을 좋아했죠. 자기들을 이해해주는 신세대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반대로 나는 꼰대 선생님이어서, 교칙 위반을 깐깐하게 잡았죠. 당시에 담임을 하지 않아서 학생들의 교칙 위반을 지적할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무단 외출이나 배달 음식을 발견하면 꼭 벌점을 줬어요. 그러다 학생들이랑 그 선생님에 대해 얘기하게 된 적이 있는데, 나는 학생들에게 물었어요. 그 선생님이 너희를 그렇게 눈감아줄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 학생들은 여러 추측을 했지만 내가 생각한 정답은 이거였어요. 다른 대다수의 선생님들이 교칙 위반을 눈감아 주지 않기 때문이야. 모든 선생님이 너희를 봐줬으면 학교가 난장판이 됐을걸. 너희가 지금은 무단 외출이나 배달 음식 정도에서 그치지만 아무도 너희를 안 잡으면 오토바이도 훔치고 친구도 때리지 않겠어? 그러면 그 때는 그 선생님도 교칙 위반을 눈 감아줄 수 없을 거야.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어쩌면 선생님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 내가 바라보는 그 선생님의 모습과 같을지도 모르겠어요. 선생님같은 대다수의 선생님들이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이고 무섭게 학생들을 지도하기 때문에 학교의 질서가 유지되는 거고, 나는 학생들에게 웃어주면서 혼자만 좋은 사람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고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나같은 사람만 있으면 학교가 유지되지 않을 수도 있죠. 나는 확실히 무서운 선생님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계속 학생들에게 웃어주고 싶어요. 왜냐면 나는 학교를 지키려고 선생님이 된 게 아니거든요.
학교에서 사고가 안 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학교를 없애는 거예요. 아이들이 집에 있든지 일을 하러 가든지 어쨌든 학교에 오지 않으면 학교폭력도 없고 학교가 시끄러워질 일도 없죠.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학교를 만들어서 모든 애들을 강제로 오게 하는지, 선생님도 아실 거예요. 학교를 다녀야 훌륭한 사람이 되니까요. 애들은 학교생활을 하려고 학교에 오는 게 아니에요. 학교 밖에서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학교에 와요. 아시겠지만, 학교는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수단적 가치를 갖는다는 말이에요.
나같은 선생님만 있으면 학교는 더 시끄러울 거예요. 더 엉망진창이고 질서가 잡히지 않겠죠. 그런데요. 학교가 조용하고 질서가 잡히면 그걸로 만족하실 건가요? 아니잖아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내가 없어도, 무서운 사람이 없고 처벌이 없을 때에도 바르게 살아가게 하려고 학교를 만든 거잖아요. 교육을 한다는 건 강자 앞에 움츠리는 사람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도덕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드는 일이고, 학교는 교육을 하려고 만든 기관이잖아요. 학교를 위해서 학교를 만든 게 아니라, 교육을 위해서 학교를 만든 거잖아요.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달래고 타일러도 실실 웃고 도저히 지도가 되지 않던 학생이 무섭게 분위기 한 번 잡았더니 말을 잘 듣더라고 하셨죠.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학생이 선생님이 아니라 제 앞에 와서도 말을 잘 들을까요? 선생님은 무섭고 젊은 남자고 나는 딱 봐도 조그맣고 약한 여자인데요. 나라고 해서 그런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는 뾰족한 수를 가진 건 아니에요. 나도 그런 학생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선생님이라고 해서 그 학생을 교육하는 데 성공한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 학생은 교육이 된 게 아니라 그냥 처벌을 겁내는 거죠. 개나 원숭이처럼.
고등학생 때 체벌을 받으면서 생각했어요. 체벌은 행동 교정은 맞지만 교육은 아니라고. 교육은 학생들을 반성하게 하는 거고 마음을 고쳐먹게 하는 거죠. 근데 체벌을 통해 학생들이 배우는 건,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한 삶의 태도예요. 체벌은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아갈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벌을 받지 않을까를 궁리하는 사람을 만들어요. 그렇게 자란 사람들은 앞에 강자가 없으면, 처벌이 없으면, 들키지 않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나쁜 행동을 하겠죠. 그래서 나는 체벌이 합법이던 시절부터 체벌에 반대했어요. 단지 아파서가 아니라, 학생의 기분이나 안락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육을 위해서요. 교사가 된 지금 아이들에게 겁을 주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상벌점제가 있는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한 적이 있어요. 벌점이 쌓인 학생들이 갑자기 칠판을 닦거나 짐을 옮겨준 다음에 말하더군요. 선생님, 상점 주세요. 그러면 저는 말했어요. 지금 상점을 주면 너는 상점 받기 위해 착한 행동을 한 사람이 되잖아. 근데 나는 네가 그냥 착한 행동을 좋아해서 착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그리고 속으로 덧붙였어요. 이게 내가 너를 존중하는 방식이고 너를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는 방식이란다. 물론 겉으로 말하진 않았지요. 상벌점을 활용하는 선생님이 대부분이고, 그 선생님들의 마음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상벌점으로 쉽고 빠르게 평화로운 학교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나도 알아요. 다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거에요.
알고 있어요. 애들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르죠.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고요. 애들에게 나는 그냥 만만한 선생님, 호구일지도 몰라요. 지금 사회가 내 마음같지 않다고 선생님은 말했죠. 지금 아이들은 약육강식에 익숙하고 그게 현실이라고요. 그런데요. 나는 사회를 바꾸려고 선생님이 됐어요. 교육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이 사회를 바꾸니까요. 우리 교육은 사회가 알아서 바뀌기를 기다려요. 사회가 교육보다 더 빨리 바뀌고, 교육은 그마저도 쫓아가지 못해서 허둥거리죠. 근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렇다’도 중요하지만, ‘이래야 한다’도 함께 가르치라고 교육이 있는 거잖아요. 현실만 말하는 세상 속에서, 현실과 함께 이상도 말할 책임이 교육에게는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철학은 세상을 해석해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말에 나는 동의해요. 그래서 나는 계속 이상주의자이고 싶어요. 현실은 누구나 차고 넘치게 가르치고 있으니까, 나는 이상을 가르치고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선생님들의 노력 위에서 편히 쉬는 무임승차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나도 단호하게 할 때는 단호하게 하고, 교칙에 대해서는 깐깐하게 굴고 있어요. 우리 반 애들은 원고지에 사과 편지를 써요. 내가 매일 종례 후 30분에서 1시간 뒤에나 교무실에 돌아오는 거 아시나요? 하루동안 잘못한 일이 있는 학생은 종례 후에 사과 편지를 쓰고 하교하게 해서 그래요. 편지를 쓰는 것으로 진짜 반성이 되냐 하면 그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저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처벌을 하고 학교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예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우리 반 애들이 저를 함부로 대한다고 하셨지만, 저는 애들한테 깍듯한 대접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보다는 친근한 선생님이고 싶어요. 저희 반 애들은, 제가 원하는 정도의 예의는 저에게 주고 있어요. 어른 대접은 못 받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애정을 주고받으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해요.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예의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요.
학생일 때, 어른이 되면 후회할 거라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제가 무슨 행동을 하면 어른들이 그러시더라고요. 나중에 후회할 거다. 그러면 저는 그렇게 대답했어요. ”어른이 돼서 후회할지도 모르죠.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요.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나중에 어른이 되면 후회할게요.“ 지금 나는 초짜 선생님이고, 꿈만 큰 어린애일 수도 있어요. 몇 년 뒤에는 지금의 제가 틀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그때 가서 후회할래요. 지금 나는 너무 젊으니까요.
이상이 너무 크다, 그 이상에는 닿지 못할 거다, 그런 말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웹툰에서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해요. ”내 꿈은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야. 내 꿈은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내가 되는 거야.“ 저도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에게 중요한 건 올바른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 그리고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을 알아내는 것, 그리고 그 길을 걷는 것, 이렇게 3가지예요. 내 목적지는 평화로운 학교가 아니라 더 올바른 세상이고, 그 방법은 교육을 통해 사람을 바꾸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 길을 걷고 있어요. 이 길이 내 목적지에 도달하는 올바른 길이라면,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 목적지에 닿기 전에 퇴직을 하고 늙어 죽더라도요. 나는 그냥, 꾸준히 걷는 삶을 살고 싶어요.
자사고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학생이 졸업생이 되어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를 보고, 뭐가 좋은 행동이고 뭐가 나쁜 행동인지 자기한테 가르쳐준 사람이래요. 저는 그 말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