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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알 Apr 02. 2024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마침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에 사는 친구 두 명이 같은 시기에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졸업한 지 벌써 20년이 훌쩍 더 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종종 만난다. 예전에는 주기적으로 모여 함께 엠티도 가고 자주 봤던 것 같은데 하나둘 가정을 이루고 난 뒤로는 결혼식, 돌잔치, 장례식 등의 경조사나 이번처럼 해외에서 친구들이 한국에 올 때 말고는 좀처럼 모이기가 쉽지 않다. 소식이 끊긴 친구들을 제외하더라도 15명가량이나 아직까지 연락하고 지내고 있다. 이번 모임은 평일 저녁인데도 8명이 나왔다.


우리는 예전에 자주 가던 동네 호프집으로 향했다. 손님이 많아 옆 가게까지 확장했다가 코로나의 여파로 다시 옛날 크기로 돌아왔다. 그래도 꾸준히 동네 사람들이 찾아주어 그날도 거의 만석이었다. 북적북적 시끄러운 가운데 주문한 반반 치킨과 골뱅이 소면이 나왔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요즘 뭐 하고 지내? S는 오늘 야근이라 못 온다더라, M네 애가 벌써 초등학생이라고? H는 이제 박사 논문만 쓰면 되는 건가?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하다 이야기는 돌고 돌아 어릴 때 우리 반이 학교 대표로 합창대회 나갔던 이야기, 졸업하고 10년이 되던 해에 학교 그늘집에 모여 담임 선생님 댁에 놀러 갔던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살던 동네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강동구 고덕동은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은 동네였다. 지금은 고층의 브랜드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버렸지만, 그 시절에는 모두 시영아파트, 주공아파트 단지였다. 우리 집 앞에 놀이터가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과 매일 같이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술래잡기, 나이먹기, 땅따먹기 등을 하며 놀았다. 아파트 화단에 봉숭아꽃이 피면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였고 파브르 곤충기를 보며 사마귀, 메뚜기, 방아깨비, 매미, 풍뎅이, 나비 등 곤충 채집을 했다. 겨울이 되면 눈이 쌓인 아파트 단지 내 언덕에 올라가 쌀 포대나 누군가 버린 장판을 잘라 신나게 눈썰매를 탔다. 서울이지만 물 맑고 공기 좋은 강동에서 시골 아이들처럼 뛰어놀았다.


달라진 것은 아파트 단지만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여자중학교는 남녀공학이 되었고, 고덕 뒷길은 미나리광과 비닐하우스가 사라지고 4차선 도로가 들어섰다. 해태백화점 자리에는 이마트가 들어온 지 오래고, 주양쇼핑이 사라지면서 주돈(주양 돈가스)도 다른 곳으로 이전했으나 그 맛이 예전같지 않다더라. M이 임신했을 때 같이 간 게 마지막이었는데 그 아이가 벌써 초등학생이라니. 그래도 아직까지 변치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초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주택가 정도인가 싶었는데 그마저도 최근 주택을 개조한 힙한 카페가 생기고 있다고. 주택가 골목골목에 있던 분식집, 문방구, 만화책방, 방앗간의 정겨운 모습이 잠시 떠올랐다 이내 흐려졌다.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하는 동안 바뀐 동네만큼 우리의 삶도 많이 달라졌다. 아직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거나 해외에 거주하는 친구들도 있다. 누군가는 부모가 되었고, 가톨릭 신부님이 된 친구도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생각해 보면 같은 반이었다는 공통분모 말고는 남은 공통점이 몇 개 없다. 그럼에도 10년 후 또 20년 뒤 다시 모여, 요즘 어떻게 지내? 하고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옛날 이야기를 하겠지. 동창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계속 바뀌고 사라지는 기억들도 많아지겠지만 우리가 함께한 어린 시절이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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