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투명하고, 해석은 나의 역사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건은 그냥 터졌을 뿐인데, 왜 나는 이렇게까지 괴로울까?”
최근에 연달아 두 가지 일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저 생활 속에서 한 번쯤은 생길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마음이 예상보다 훨씬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조금 집요하게 파보기로 했다.
‘사건’이 아니라, 그때 내 안에서 일어난 ‘감정’ 쪽을.
러닝 동호회에서 마라톤 대회를 나간 날이었다.
나는 그 모임이 아직 어색하다. 겉으로는 인사도 하고 웃지만, “편하다”는 느낌과는 꽤 거리가 있다.
대회가 끝난 뒤, 동호회 사람들끼리 뒤풀이를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 안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올라왔다.
“같이 나갔으니 예의상 가야지.”
“사실은 집에 가서 쉬고 싶다.”
결국 첫 번째 목소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 한 번 나왔는데 끝까지 같이 있자.”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뒤풀이 장소로 갔다. 식당에 들어가니 예상대로 술과 고기가 나오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가 나쁘거나, 사람들이 나쁜 건 아니다. 그냥 나와는 잘 안 맞는 자리였다. 조금 어색하고, 웃음도 힘을 줘야 나오고, “언제 끝나나…”를 속으로 세면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장애인 주차구역을 막았다는 이유로 벌금 통지가 날아왔다. 술집 건물 관리소장이 주차하라는 곳에 했을 뿐이다. 그러니 책임은 운전자에게 있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설명이 내 마음을 전혀 위로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속에서는 이런 말이 반복됐다.
“나는 그냥 관리 소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왜 결국 책임은 항상 나 몫이지?”
“좋은 마음으로 따라갔을 뿐인데, 왜 이렇게 돌아오지?”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내가 지금 이 사건을 ‘내가 평생 살아온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더 괴로운 건 아닐까?”
두 번째 사건은 더 개인적인 자리에서 벌어졌다. 사고 대차로 받은 마칸(렌터카)을 타고, 친한 지인들을 태워 회를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사실 지인들을 태워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한 번 태워줄게”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문제는 목적지 근처 골목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좁고, 주차할 공간이 거의 없었다.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고, 차는 많고 자리는 없고, 골목은 막히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지만 이미 지인들과 약속을 했고, “내가 다 데려다준다”라고 한 상황이라 그 마음을 입 밖에 꺼내진 못했다. 겨우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고, 회집에 들어갔다.
나는 이미 배가 좀 부른 상태였고 무엇보다 금주 중이었다. 사람들이 술잔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나는 마실 수 없었고,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분위기와 살짝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몸은 피곤했고, 속은 그다지 허기지지 않았고, 머릿속에서는 “차라리 집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그날, 주차해 둔 마칸이 누군가에 의해 긁혔다. 뺑소니였다. 면책금 50만 원을 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리보다 먼저 감정이 치솟았다.
“내가 편하려고 온 자리도 아닌데… 남들 좋자고, 같이 시간 보내자고, 좋은 마음으로 한 선택인데… 왜 항상 이런 식으로 돌아오지?”
이번에도 똑같았다. 사건 자체보다 더 아픈 것은 **‘내가 불편함을 참고, 나를 희생해서 만든 자리에서 일이 터졌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건을 곰곰이 뜯어보니, 공통점이 보였다.
나는 둘 다 “가기 싫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이미 불편함을 신호로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나갔으니 가야지.”, “태워주기로 했으니 끝까지 해야지.”라는 의무감과 남의 기대를 앞세워서 그 신호를 무시했다.
쉽게 말해, “내 마음은 이미 ‘아니요’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억지로 ‘예’라고 행동했다.”
그 상태에서 사건이 터지니 그 사건은 단순한 벌금, 단순한 면책금이 아니라, “또 내가 참았는데, 또 내가 손해 보는 상황이네.”라는 평생의 감정 패턴을 자극하는 방아쇠가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비로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사건은 그냥 일어난 일이다. 내가 괴로운 이유는 그 사건을 지금까지의 내 인생 방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번 두 사건이 힘들었던 진짜 이유는 벌금 액수나 면책금이 아니었다.
“착하게 행동했는데, 결국 손해는 내가 보는구나.”라는, 내가 살아온 인생 전체에 깔려 있던 오래된 문장 때문이었다.
가족을 위해 참았던 시간들
책임을 대신 떠안았던 경험들
남들 눈치를 보며 결정했던 많은 순간들
과거의 기억들이 이번 사건 위에 겹겹이 덧씌워진 것이다.
사건은 그저 ‘현상’ 일뿐인데, 그 위에 평생의 기억·감정·패턴이 포개지면서 감정의 크기가 실제 사건의 크기를 훨씬 넘어섰던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감정은 현재의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 전체가 한꺼번에 반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을 없앨 수는 없다.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일은 계속 일어난다. 그렇다면 바꿀 수 있는 건 내가 선택하는 방식뿐이다. 이번 일을 겪고 나서 아주 단순한 원칙 하나를 세우기로 했다.
“내가 불편하면, 그 선택은 다시 생각한다.”
어색한 뒤풀이 자리라면
→ “오늘은 먼저 들어갈게요.”라고 말할 용기
내가 금주 중인데, 굳이 술자리에 가야 할지
→ “오늘은 밥만 같이 먹자.” 혹은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자유
좁은 골목을 몇 바퀴 돌면서까지 억지로 차를 넣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 “차라리 다른 곳에서 만나자.”라고 제안하는 선택
즉, 남에게 잘해주는 것과 나를 희생시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몸으로 배우려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왜 이런 일이 나한테만 생기지?”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그때, 이렇게 한 번 바라보면 어떨까 싶다.
“사건은 그냥 일어난 일이다. 지금 이 감정은 내가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해석 뒤에는
내가 평생 살아온 습관과 상처가 숨어 있다.”
사건은 투명하다. 그 사건에 색을 입히는 건 언제나 나의 마음이다.
그래서 감정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라, “너, 이렇게 살아왔구나.”, “너는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는구나.” 하고 알려주는 신호에 가깝다. 그 신호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아, 이번 사건이 나를 힘들게 한 이유는 사건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오래된 패턴 때문이었구나.”
그리고 그때 비로소, 사건은 그냥 흘려보내고 나 자신을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볼 힘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