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은 우리를 관찰자로 만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아.”
“거리를 두고 볼 줄 알게 됐어.”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어.”
이 말들은 성숙해 보인다. 실제로도 그렇다.
관찰자 모드, 투명 모드는 분명 우리를 살려낸다.
너무 아플 때, 너무 억울할 때, 너무 무너질 것 같을 때 한 발짝 물러나서 보는 능력은 삶의 안전장치다.
문제는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릴 때다.
관찰자 모드에 익숙한 사람들은 세상을 아주 잘 설명한다.
왜 저 사람이 저러는지 알고, 왜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지도 알고, 왜 이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는지도 안다.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 구조가 그렇지.”
“그럴 수밖에 없지.”
“내 문제가 아니야.”
이건 분명 과거의 나보다 훨씬 건강한 태도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느낌이 스며든다.
삶을 이해하고는 있는데, 살고 있는 느낌이 없다는 감각.
관찰자 모드가 길어지면 삶은 점점 이런 모습이 된다.
기쁨은 너무 깊이 들어가기 전에 미리 거리 두고 바라보고, 고통은 “이 또한 지나가겠지”라는 말로 빠르게 정리해 버린다. 그래서 큰 파도는 없지만 큰 몰입도 없다. 삶은 안정되지만 밀도는 옅어진다.
이 상태를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나 ‘초연함’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이런 문장이 숨어 있다.
“너무 기대하지 말자.”
“너무 좋아하지도 말자.”
“그러다 다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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