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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삭제 Feb 14. 2024

시험공부

공부는 핑계고~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전에 있는 기말 시험을 위해 우린 또 모였다.

"우리 이번 시험, 같이 밤새우며 공부할래?"

제안은 안산에서 전학 온 안산댁이 하고, 장소는 중국집을 하는 일명 태지마누라 가게로 정하고, 우리는 일사천리의 실행력을 보였다.

각자의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고 토요일에 모이기로 했다.  가게는 일요일이 휴무라 다음날까지도 머물 수 있었다.

"옴마, 내 토욜 친구 가게에서 밤새 시험공부 하끼다."

엄마는 다 큰 딸이 외박한다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밤새워 공부를 한다는 것에 놀라 어이없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느그끼리 공부를 하긴 하긋나? 고마 같이 밤새 놀고싶다카지?"

자신의 딸과 친구들을 너무 잘 아는 엄마였다.

"아이다, 진짜로 공부하끼다."

단번에 들켜버린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나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함부레 느므 가게 가서 안 번잡시럽고로 단디해라이!!"

"당근이지 우린 참말로 딱! 공부만 하끼다."


당일날 우린 각자의 가방에 공부할 것들과 간식거리를 싸들고 중국집 마치는 시간에 맞춰 모였다.

친구 부모님은, 딸과 친구들이 모여 공부를 한다고 하자 자장면과 탕수육을 만들어주고 가셨다.

가게는 한쪽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좌식용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는 구조였다. 좌식용 테이블이 놓인 바닥은 따끈따끈하게 온돌기능도 있었다.


우리는 일단 음식이 식기 전에 배를 채우기로 했다. 손수 뽑아낸 면이 일품인 자장면과 갓 튀겨낸 바싹한 탕수육을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허기를 달래고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배가 부르고 바닥이 뜨끈뜨끈하니 살살 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신을 다잡기 위해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고 다시 앉았다.

그렇게 겨우 뭔가를 하나 싶었는데, 새로 온 일본어 선생님의 이야기가 터지기 시작했다. 여고로 첫 부임을 온 수줍은 총각선생님은 여고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으제 쌤이 난테만 질문하는거 봤제? 암만해도 낸테 관심이 있는기라."

"야! 그건 으제 날짜가 니 번호라 그른거 아이가?"

"어머, 니네들은 남의 남자한테 뭘 그리 흥분하고 그러니?"

안산댁 말에 태지마누라와 내가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오데? 쌤 애인 읎다켓다."

"어머, 몰랐니? 일본어 선생님 내 남자인거?"

"이기 오데서 약친 오이 씹다 이빨 빠지는 소릴 씨부리고 자빠졌노?"

"야가 돌앗네, 일어쌤이 눈이 쪼맨해서 니그튼 새까만 아는 뵈도 안 해야!!"



좋아하는 연예인은 다 다르면서 선생님은 왜 한 사람에게만 꽂혔을까.

내 남자 입네, 나를 보았네, 나한테만 말을 걸었다는 쓸데없는 설왕설래로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는지 조차 신경 쓰지 못하고 아옹다옹거렸다.

"근데 느그들 그거 아나? 갱이가 이번 쌤 생일선물로 억수로 갑난 지갑 사준 거."

태지마누라의 말에 안산댁과 내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옴마, 가시네 부잣집 딸래미 티내나?"

"어머, 선생님 생일이었어?"

놀란 나와 태지마누라에게 한심하다는 눈빛을 날리던 안산댁이 말을 이었다.

"이봐라, 이바!! 느그들은 좋아하는 남자 생일도 모리나?"

"그람 니는? 니는 알았나?"


우린 다 몰랐다. 그저 하나뿐인 총각선생님이라 관심을 가졌고,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단순한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창 우리의 주제는 총각선생님에 머물러 주 목적인 공부는 뒷전이 되었다.


"그란데, 그제 반장 갸는 와 또 갑작시리 승질을 내고 그라는데?"

"그랑께 말이다. 갸는 내도록 그날인갑다."

"내는 글키 모시기 힘든 반장은 세싸 첨이다."

부반장인 안산댁이 한마디 거들었다.


"내 올마전에 엄청시리 잘생긴 남자 봣다아이가?"

"오데서?"

"솔리드 이준보다?"

당시 교포출신 솔리드 이준의 외모는 글로벌하게 잘생겼었다.

"정말 나 우리 아빠 때문에 속상해."

"야!! 치아라, 울 아빠는 있다 아이가..."

"요것들이 복에 겨워 요강에 오줌 싸는 소리 하네, 느그들은 난테 비하면 공주다."

밑도 끝도 없는 수다는 할수록 샘솟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수다에 우리가 모인 목적은 어느새 조잘거리는 입안으로 삼켜져 버렸다.



그렇게 점점 시간은 흐르고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정자세로 앉아서 떨던 수다는 점점 드러눕는 자세가 되어, 다 같이 천장을 바라보면 하염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진심을 다해 떨어댄 수다에 꺼진 배를 싸 온 간식으로 다시 채우자, 뜨끈한 바닥의 열기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졸립다. 우리 딱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날까?" 안산댁이 제안하고,


"그라까?" 내가 거들고,

"어차피 밤새서 하낀데, 한 시간쯤은 안 괜한것나?" 태지마누라가 확실한 마무리를 지었다.


이때부터 우린 이렇게나 쿵작이 잘 맞는 친구였다

그렇게 우린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알람시계가 있어 시간을 맞출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라 타이머를 설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다음날 아침 가게에 들른 친구 엄마가, 테이블 위에는 오만가지 책을 난장판으로 벌여놓고, 각자 적당한 자리를 잡고 대자로 뻗어 자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차서 질러댄 잔소리 알람에 우린 잠을 깼다.

당연히 우리의 기말시험공부는 망했다.

그래, 뭐 공부가 중요한가.

우리가 밤새 이야기 나눈 그 밤, 그 순간이 소중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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