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분식집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정통 일식집을 꿈꾸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름만 일식이고 맛은 한식인,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남의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아서 기술을 가르쳐 주기로 한 주방장 삼촌은 하루가 멀다고 술을 마시고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가 야심 차게 가르쳐준 돈가스 소스나 수프는 원래 가게 주인의 것과는 다르게 뭔가 빠진 듯 아쉬웠다. 그대로 주방장 삼촌만 믿고 있을 수 없었다. 엄마 아빠는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요리를 만들어야 했다.
돈가스를 포기할 수 없었던 엄마는 다녀간 식당을 하면서 쌓아 온 노하우로 이런저런 재료들을 보태고 빼가면서 우리 분식집만의 비법 소스를 만들어냈다.
아빠는 고추장에 갖가지 나물과 상추, 깻잎을 넣어 비벼 먹을 수 있게 개발한 이름 하여 ‘생채 비빔밥’을 만들었다. 지금이야 대수롭지 않지만, 당시엔 삶은 나물들만 넣어 먹던 비빔밥에 싱싱한 상추와 깻잎을 곁들여 먹는다는 게 나름 신선했다.
또다시 찾아온 위기를 엄마 아빠는 빠르게 극복했다. 전문적인 기술이 들어가는 일식가게지만, 엄마 아빠가 잘하는 음식들로 채워 나갔다. 그렇게 ‘삼별초밥’을 인수한 지 삼 개월 만에 속 썩이는 삼촌을 보내고 간판도 내리게 되었다.
익숙하고 다양한 이것저것 모든 것들을 메뉴로 내걸 수 있는 분식집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식당 경력이 충분한 엄마 아빠에게 분식집의 메뉴는 배우지 않아도 가능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노리며 글로벌한 ‘코리아나 분식’이란 새로운 상호를 걸었다. 우리 집은 분식집으로 다시 태어났다.
급하게 이름을 지어야 했던 부모님은 아마도 ‘88 올림픽’이 얼마 지나지 않은 1990년이라 올림픽 주제곡을 불러 유명한 가수 이름을 빌려왔던 것 같다.
초반에는 주력으로 내세운 엄마의 돈가스보다 아빠의 생채 비빔밥과 볶음밥이 더 잘 팔렸다.
다년간 중국집 주방장으로 있는 아빠의 조카이자, 나의 사촌 오빠에게 배워 온 볶음밥은, 당근과 양파 등 각종 요리를 불에 볶아 살짝 불 맛을 입힌 뒤, 고슬고슬한 흰쌀밥과 함께 볶아내서 아기 한쪽 궁둥이처럼 예쁘고 오목하게 담아, 노란 계란 옷을 입히고 직접 만든 자장소스를 살짝 곁들여 주는 것이 다른 분식집 볶음밥과 차별화한 메뉴였다. 그 자장소스 역시 사촌오빠에게서 아빠가 직접 배운 것이었다.
아빠의 생채 비빔밥과 볶음밥은 근처에 일하는 회사나 다른 가게 직원들의 점심메뉴로 치고 빠질 사이드 메뉴 격이었다. 그러나 점심이고 저녁이고 아빠의 생채 비빔밥과 볶음밥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예상외의 일이라 상추와 깻잎을 일일이 채를 썰어야 하는 아빠의 손은 바빴지만, 무엇이 팔리든 많이만 팔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글로벌한 이름 덕인지 돈가스, 볶음밥, 비빔밥 등 일식, 중식, 한식을 아우르는 ‘코리아나 분식’은 그렇게 순항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