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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Feb 22. 2024

낙관과 비관 사이

삶은 살짝 낙관에 치우친 어딘가에 있다.

*2023년 영화 〈웡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를 살펴보았다가 온 책장이 쇼펜하우어로 도배된 것을 보고 탄식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작금의 한국은 왜 쇼펜하우어에 열광할까? 느닷없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강독하고 싶은 의지가 스멀스멀 올라와서? 아니면 칸트와 헤겔의 헤게모니에 담대히 맞섰던 그의 철학에 흥미가 생겨서? 그럴 리가. 책장에 꽂힌 책들은 대부분 쇼펜하우어의 비관론, 혹은 그에 가까운 입장을 기반으로 한 각종 처세술을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쇼펜하우어는 자기를 이해해줄지정 이런 식의 독서조차도 비관적으로 보았다. "독서는 스스로 사고하기의 단순한 대용품에 불과하다. 독서를 하면 남의 생각에 자신의 사고가 끌려다닌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굉장히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중요한 철학사적 함의를 갖지만,  평생을 과민하게 살았으며 신랄하게 삶을 비관하는 태도를 보통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 "세상이란 실은 지옥이다. 인간은 한편으론 들볶이는 영혼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영혼 속의 악마이기도 하다." 세상이 지옥이고 인간이 그에 들볶이고 그에 속한 악마라면, 도대체 보통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지옥에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 있을 보통 사람은 별로 없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자살 불법화에 대한 반대 논거를 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실로 삶과 세계를 한 폭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지옥도로 보았나 보다.


 삶이 지옥이 아니듯 낙원도 아니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분별 있는 이라면 알고 있는 일이다. 중세 교부들은 신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현실에 구더기처럼 들끓는 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토론과 논쟁을 거듭했다. 오늘날 한국은 천천히 소멸의 길을 걷고 있으며, 태어나는 이 없이 천천히 죽어가는 이들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나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때가 되면 죽어 썩어 사라질 운명이다. 인간에게 영원한 영광과 행복을 기약할 터인 성경에서도 말하지 않던가.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Vanitas vanitatum, dixit Ecclesiastes,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웡카(2023)의 한 장면

 실로 삶은 낙원에 있지도 않고, 지옥에 있지도 않다. 삶이 낙원이라면 철학과 정치와 예술과 문화와 과학과 기술은 존재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낙원을 즐기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뭣 하러 생각하고 쟁투하고 향유하고 연구하기를 반복하겠는가? 삶이 지옥이라면 철학과 정치와 예술과 문화와 과학과 기술은 존재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불지옥에서 타오르기도 바빠 죽겠는데 뭣 하러 생각하고 쟁투하고 향유하고 연구하기를 반복하겠는가?


 그렇다면 삶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 2023년 영화 〈웡카〉다. 영화는 전형적 고전 가족 영화처럼 이렇게 말한다.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은 꿈으로부터 시작한다."(Every good thing in this world started with a dream)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그저 낙관적이고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티모시 샬라메 분의 '윌리 웡카'는 로알드 달의 원작《찰리와 초콜릿 공장》(1964)에 등장하는 인물 '윌리 웡카'와는 실로 다른 인물로 그려지는데, 원작의 웡카가 속을 알 수 없는 괴짜, 또라이,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인물이라면 영화의 웡카는 유능하고 성격도 밝은 데다 사업 수완까지 있는 만능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웡카는 잘생긴 데다 각종 마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술을 가졌다. 유능하고 밝은 성격에 개인기까지 갖춘 미남이라니! 너무 부럽다.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큼 영화는 시종일관 정신없고 산만하지만 환상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마치 '세상은 이렇게 낙원 같은 곳이란다' 하고 달콤한 사탕으로 꼬드기는 악마처럼, 영화는 전면적으로 낙관론을 내세운다. 그렇지,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은 꿈으로부터 시작하는 법! 그러나 영화가 익살스럽게 그려내는 배경은 천천히 톺아보면 생각보다도 암울하다. 청소년과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 착취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공직자는 부패한 기업인의 로비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신에게 헌신해야 할 종교인들마저 카르텔에 매수되어 버린 현실을 영화는 그려낸다. 이런 지옥 같은 현실에 대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 '누들'은 이렇게 말한다. "항상 욕심쟁이가 가난쟁이를 이겨. 윌리, 그게 세상의 이치야." 그리고 작품의 환상적인 이종족異種族 움파룸파는 영화가 끝날 무렵 웡카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 돌아갈 거야, 그게 현실이니까." 마치 영화가 그려내는 환상은 실은, 어둡고 칙칙하고 구더기 끓는 현실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을 관객에게 선고하듯이. 초콜릿 카르텔에 대한 승리는, 웡카와 같이 유능하고 밝은 성격에 개인기까지 갖춘 미남이 아니라 보통의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선고하듯이.


 그러나 웡카는 현실로 돌아가겠다는 환상에게 말한다. "함께 가자"고. 영화는 그렇게 웡카가 꾸는 환상의 몽상이 그 유명한 초콜릿 공장이 되는 장면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영화는 분명히 이 세상이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음을,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몽상에 따라 해결되지 않음을, 유능하고 성격 밝은 미남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에서도 우리의 삶은 낙관적일 수 있고 환상적일 수 있으며,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이 꿈에서 시작할 수 있음을 영화는 웡카의 입을 빌려 말한다.


  나는 삶이란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낙관과 비관 사이에 있다고 믿는다. 삶이란 조증과 울증 사이에 있다고 믿는다. 모두가 상처를 품고 살아가지 않던가. 나도 그렇다. 모두가 살짝 미쳐있지 않던가. 나도 그렇다. 모두가 미친 듯이 웃으면서 눈물 흘려본 적 있지 않은가. 나도 그렇다. 모두가 구역질 나는 악행을 당해본 적도, 저질러 본 적도 있지 않은가. 나도 그렇다. 그러나 악취 풍기는 진흙을 뚫고 피어난 연꽃이 아름답듯, 비관적인 삶의 풍경 속에서 비친 어렴풋한 낙관의 빛 또한 아름답다. 삶이란 비관과 낙관 사이, 특히나 낙관에 아주 살짝 치우친 그 중간지대 어딘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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