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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쓰니 Aug 15. 2023

방 한 칸이 내 공간의 전부였던 시절

서울 유학생의 주거 환경

 스무 살에 서울에 왔다. 인서울 대학에 합격한 것. 입학의 기쁨도 잠시.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는 일에 대해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점수를 만드는 것에만 몰두한 3년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면 그 시절의 내겐 힘이 없었다, 물론 돈도.


 수능 점수로 인서울 하는 것과 서울 입성은 다른 얘기였다. 당연히 입소할 줄 알았던 기숙사는 자리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따로 집을 구해야만 했다. 나처럼 지방에서 온 학생은 하숙이나 자취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숙사에 들어간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단과대학 수석이나 차석급에게만 주어진 기회. 기숙사는 유명무실했다.




 "논스톱에 나오는 집을 생각하면 안 돼요" 하숙집을 찾으러 다니던 날 이모의 지인인 학교 선배가 말했다. <논스톱>은 1990년 후반에 유행한 인기 시트콤이다. TV로 본 하숙집은 여느 가정집과 같았다. 방이 하나씩 있고 거실에는 커다란 소파가 있었다. 그게 현실과 다르다고? 선배의 말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실제 하숙집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거실이 없는 건 그렇다 쳐도 방에서 침대는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침대와 책상이 들어갈 만큼 넓은 방이 거의 없었다. 그 정도 크기는 2인실이었다. 대부분이 침대를 포기하고 책상을 택했다. 학생 신분에 걸맞은 타협이랄까. <논스톱>보다 <응답하라 1994>가 실제와 가깝다.


 그때 하숙집을 택한 건 아쉽다. 왜 하숙을 했을까. 아침, 저녁으로 밥이 나오니 부모님 입장에서도 안심이 되셨을까. 자취가 더 합리적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몇 천만 원의 보증금을 내는 대신 월세가 더 저렴하다. 대학생의 특성상 집밥도 먹을 일이 별로 없다. 공동 주거가 아니어서 사생활이 보장되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원룸으로 가자면 목돈이 필요했다. 당시의 내겐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걸 깨닫고 찾아온 감정은 후회가 아니라 비참함이었다. 집 문제에 있어서는 후회도 사치였다.


 집세를 예산에 맞출수록 동네가 점점 높아졌고, 방은 작아졌다. 결국 가장 높은 에 안착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어차피 학교가 산 꼭대기에 있으니 등하교가 오히려 편할 거라고 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건 학교-집 왕복 시에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번화가는 평지였다. 밥과 술모임을 가진 날이면 등산하듯 귀가했다. 인싸를 지향했던 나는 그렇게 종아리 근육을 키워나갔다.


 그 집, 아니 방을 계약한 건 월세를 2만 원 깎아주었기 때문이다. 돌아본 집 중 가장 쌌다. 다른 하숙생이 모두 남자인 데다 집주인과 같은 층인 점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방의 하나뿐만 창문이 현관 바로 옆인 것도 결함인 줄 몰랐다. 그저 방이 좁은 것만이 신경 쓰였다.


 방엔 작은 책상과 행거, 옷걸이와 거울이 기본으로 갖춰져 있었다. 전에 살던 학생이 두고 갔을 그 살림살이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다른 물건은 들일 자리도 없었고 고향 집에서 쓰던 가구는 커서 가져올 수 없었다. 책과 컴퓨터, 옷만 가져왔다. 이불과 삼단 서랍장은 새로 샀다. 이부자리를 펴고 누우면 꽉 차는 공간. 1평짜리 방이 내 공간의 전부였다.




 처음엔 편했다. 강의실까지 도보로 10분 내외. 지하철로 한 시간 넘게 통학하는 친구들의 푸념은 남의 얘기였고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아 놀 수 있었다. 집에선 거의 잠만 자니 좁은 방이 불편할 틈도 없었다. 사생활 때문에 방문과 창문은 모두 닫고 지냈다. 날이 더워질수록 힘들어졌다. 대학의 여름 방학이 6월 말인 게 다행이었다. 방학만 하면 고향 집에 내려가자. 선풍기 한 대로 버티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하숙집은 특히 밥이 맛있었다. 아침을 꼭 챙겨 먹고, 저녁밥도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집에서 먹었다. 점심은 나오지 않았는데, 약속 없는 주말엔 애매했다. 주인아줌마는 간단히 라면 정도는 끓여 먹어도 된다며 선심 쓰듯 주방 사용을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밖에서 사 온 음식을 방에서 혼자 먹었다.


 주말마다 심심하고 외로웠다. 서울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대학 친구들 뿐인데, 다들 주말에도 할 일이 있었다. 전화하면 고등학교 친구와 명동에 왔다, 엄마와 백화점에 간다 등. 그들은 바빴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지 않으려면 주말 일정을 만들어야 했다. 무늬만 대학생이지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10대 시절의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생긴 문제였다. 타향에서 1인 가구로 생활하는데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럭저럭 한 학기를 채워갈 즈음, 사건이 터졌다. 갑자기 속옷이 몽땅 사라졌다. 단출한 살림이라 물건이 사라지면 금방 티가 났다. 아줌마에게 얘기했지만 잘 찾아보라고만 했다. 아니, 찾아보고 말고 가 없다고요. 작은 단칸방에 있을 데가 빤한데. 문도 잠그고 다녔는데.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음 날 귀가하니 내 속옷 가방이 있었다. 방 한 구석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분명 아니다. 어디서 뿅 하고 사라졌다가 저절로 나타났을 리는 없고.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속옷을 가져갔다가 다시 되돌려 놓았다. 그것도 주인에게 말하자마자... 무서웠다. 그때 경찰에 신고했어야 했다. 내가 마땅히 느껴야 했을 감정은 분노였지만 당시엔 그저 놀라고 두렵기만 했다. 유리멘탈, 전투력 제로의 개복치, 그게 나였다.


 그 집엔 초등생 남매가 있었다. 어린 남자애가 장난친 걸까? 아니면 주인아저씨인가? 그 가족이 의심되었지만 증거는 없고. 자초지종을 말해도 끝까지 시치미 뚝 떼고 모르쇠로 일관하던 주인아줌마. 언제는 "우리 큰 딸"이라며 입에 발린 소릴 하더니... 더 이상의 문제제기는 시간낭비였다.


 집을 옮기기로 마음먹을 무렵, 적당한 계기가 생겼다. 여름 방학 때 간 농촌 봉사 활동에서 친해진 선배 언니가 동거를 제안한 것. 핵인싸인 언니는 쾌활한 데다 말도 재미있게 했다. 나와 정반대의 성격. 같이 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주인아줌마한테는 방을 뺀다고 통보했다. 원래는 1년을 살기로 되어있었다. 아줌마는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였는지 자신의 "큰 딸"을 순순히 보내주었다. 뚱한 얼굴을 뒤로 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뿐했다. 그렇게 자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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