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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 Sep 04. 2024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눈치가 없다는 진실_

최근 어떠한 일을 계기로 알게 된 '나'는 눈치 없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때 짓궂은 남학생들 중 꼭 그런 애가 있었다.

같이 놀다 애들이 짓궂은 표정으로 일제히 나를 막 놀리다가도

내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면, 관두고 화제를 돌리거나 한다.

그런데 꼭 눈치 없는 애가 하나둘씩 있어서 깔깔 웃으며 끝까지 놀려대다

나를 기어이 울리거나 나와 씩씩대며 다투곤 했다. 

내가 눈치 없는 사람을 '쟤는 왜 저렇게 눈치가 없냐' 라며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내가 너무 눈치를 많이 살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큰 나머지, 상대방의 욕구를 먼저 살피고 맞추어 주려 애써왔다. 

사랑받고 싶어 잘하려고 눈치를 살피고

애쓰다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기대했던 만족의 반응이 오지 않으면

좌절하고, 동시에 분노와 억울감에 휩싸인다.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나의 익숙한 패턴이다. 

그렇다고 내가 삶의 주도권까지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살피고 매번 맞추려고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관계에서만큼은 되도록 상대방에게 맞춰주려 했던 적이 많았다.

내 안의 나는 불만족스러웠던 적이 많았으나, 겉으론 늘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늘 내 안에는 '억울감'이 함께 했다. 

 

내가 누군가의 어떤 점을 싫어한다면, 그 이유는 내 안에 있다. 

그늘 없이 자란 것 같은 밝고 당당한 그런 사람이 나는 늘 부러웠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내 안의 그늘은 더 도드라지게 짙어 보였고,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눈치 안 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부러워서 그런 사람을 멋지다고 생각하며 곁에 머물렀다. 그런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너의 생각을 말해도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으며 자랐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여러 번 곱씹으며 생각만 하다가 결국 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던 나와는 달리.

 

하루는 내 지인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내가 항상 매 순간 내 지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함께 하며, 그들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도 많이 보았고 내 마음을 다쳤던 적도 많았다.

나는 그들이 완벽히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완벽히 서툰 인간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그들을 더 이해하게 되고 함께 하며 사랑과 우정을 나눌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나는 나도 모르게 늘 긴장하며 살고 있었다. 

완벽한 좋은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늘 자책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혹시나 사랑받지 못할까 봐 실수하지 않으려 나도 모르게 몸에 더 힘이 들어갔다.

나는 상대방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 지를 잘 파악했고, 받고 싶어 하는 것을 주는 것에 능숙했다. 이것은 내가 살아온 생존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때때로 너무 쉽게 지치고 삶이 무겁게 느껴졌다. 죽으면 이 무거움 대신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종종 죽음을 떠올렸다.  

내가 자라오며 여러 역할들과 책임을 맡게 되면 될수록, 나는 내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만 골몰히 생각하고 애쓰다 때때론 생각만으로도 지쳐버리곤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생각만 하다가. 

나는 타인들이 나를 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기 이전에, 내가 나 자신을 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유능해야, 내가 착해야, 내가 현명해야, 나는 타인의 평가를 거쳐 나 스스로를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타인의 평가에 민감해지고 눈치를 살피게 되는 이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들이 완벽히 좋은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 역시 완벽히 좋은 사람이라서 그들이 내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이기 때문이고 '너'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부족함이 만나 서로를 안심시키고 서로를 편안하고 기분 좋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그들이 아는 내 모습 외에도 내가 미처 보여주지 않은 내 모습들이 있을 거라고.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 걸까. 내가 알고 있는 모습도 전부는 아니겠지? 

원가족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모두 배제한 본래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내 안에 꾹꾹 숨겨둔 '나'는 어떤 모습들이 있을까. 

지금까지는 살기 위해 가르침 받고 학습한 나로 살았다면,  

앞으로는 여러 모습의 나도 조금씩 만나보고 표현하며 지금보다 편안하게 살아가고 싶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바로 지금이 그렇게 살아 볼 수 있는 딱 좋은 때인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알 수록 이전보다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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