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중순에 독일에 입국해서 쉬엄쉬엄 박사 지원 준비를 하고 있다. 런던 교수님들께 추천서를 부탁드리고 박사 진학 희망 학교 교수님들께 이메일도 보냈다. 자기소개서와 연구계획서도 지원처마다 원하는 내용이 달라서 몇 가지 버전을 만들고 있는 중이고 정말 보기 싫었던 GRE도 저번주에 뮌헨까지 가서 응시했다.
이번에 우연찮게 모 한국 기관 연수의 일환으로 비엔나 대법원과 유엔본부 방문을 수행하며 통역하는 기회를 얻었다. 통역비도 괜찮았고 뉘른베르크에서 비엔나까지 내려가야 하는 사정을 고려해 교통비도 기관 측에서 지원해 주어서 기분 좋게 일정을 조정했다. 비엔나까지 간 김에 총 3박 4일 일정을 잡아서 오랜만에 짧은 여행까지 계획했다. 비엔나는 독일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아도 왕복 기차와 숙소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이번이 처음이고 이런 계기가 없으면 앞으로도 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뉘른베르크에서 비엔나는 기차로 4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비가 안 오면 이상한 유럽의 가을이지만 웬일로 독일에서 출발할 때 날씨가 좋다 했는데 오스트리아로 넘어오자마자 구름과 안개가 가득 꼈고 비엔나는 비는 안 왔지만 그냥 그런 날씨였다. 오후 2시가 살짝 넘어 빈 중앙역에 도착했다. 처음이지만 역시 독일어를 사용하고 독일과 문화적 차이도 거의 없는 나라라 이국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숙소 체크인 시간이 늦어서 새로운 도시를 방문한 첫날에 늘 그렇듯 일단은 시내로 무작정 걸어 들어갔다. 빈 구시가지의 첫인상은 정말 정돈이 잘 된 '유럽 도시'느낌이었다. 늘 보던 규칙적으로 들어선 5-6층의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트램과 버스가 지나다니는 풍경이라 남미에서처럼 신선함은 없었다.
시내 번화가로 들어와 대충 눈에 띄던 중식당에서 매운 우육탕면을 먹고 간단하게 번화가 구경을 했다. 거리와 건물들의 생김새, 메인 거리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들, 교회의 양식까지 독일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구시가지의 규모가 엄청났다. 사실 독일 자체가 19세기말까지는 소국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비교적 대도시가 발달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세계대전 중의 폭격으로 많이 소실되어서 구시가지들이 도시관광을 할 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실제로 2차 대전 직후의 베를린 항공사진을 보면 시내 중심가에 온전한 건물을 찾아보기가 힘들고 그래서 지금도 흔한 유럽의 모습을 상상하고 방문하는 관광객을 실망하기 마련이다. 그와는 다르게 비엔나 구시가지는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다. 실제로 예전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건지, 신축건물 외관에 규제를 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규모가 크니 걸어 다니는 맛이 있었다. 조금 걷다 보니 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슈테판 대성당이 보였다. 유럽에 오래 살다 보니 교회나 성당은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도 솔직히 이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들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유일하게 신선하게 느껴진 것은 내, 외부 모두 기존의 교회 건축 양식을 비틀어 새로운 시도를 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였다. 슈테판 대성당도 여느 성당들보다 크긴 했지만 역시 별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내부에서 다음날 있을 모차르트의 레퀴엠 공연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는 장면을 본 것이 그나마 흥미로웠다.
잠시 체크인을 위해 약간 외곽에 위치한 숙소에 들렀다 오니 이미 해가 져있었다. 빈으로 가기 전 날 유럽에 썸머타임이 끝나면서 시간이 당겨져 4시만 조금 지나도 어둑어둑해진다. 확실히 건물들이 예쁘고 도시의 규모가 있다 보니 낮보다 밤의 야경이 더 매력적이었다. 중심가를 약간 벗어나 골목들에도 갤러리, 골동품상, 식당, 악보상 등이 가득한데 비록 닫혀있었지만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 좋았다. 시내 중심가는 낮이나 밤이나 사람이 정말 많았다. 지금이 학교 방학기간이라 여행객이 많은지는 모르겠는데 도시의 규모보다도 지나치게 사람이 많은 느낌이었다. 원래 같으면 맛도 없고 가격만 비싼 유럽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데 그래도 여행 온 기분을 내 보겠다고 오스트리아 식당을 찾아다녔다. 비엔나 물가는 오히려 독일보다도 비싼 느낌이었다. 시내에서 두 명이 식사를 하려면 기본 50유로는 깨질 것 같은 가격대였다. 그래도 뭐 하나 먹어보겠다고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확실히 지금 도시에 사람이 많은 건 맞는지 괜찮은 식당에는 예약이 꽉 차있거나 대기줄이 너무 길었다. 결국에는 시내 초입에 봤던 사람들이 많았던 소시지집에서 핫도그를 먹었다. 맛이 없지는 않았지만 두 명이서 핫도그, 소시지, 맥주 1병을 먹는데 거의 20유로가 나왔다. 그 와중에 맥주는 정말 맛있었다. 예전에 우연히 베를린에서 Gösser라는 브랜드의 Radler(맥주와 사이다를 섞은 음료다)를 마셔보고 굉장히 맛있었던 기억이 있어서 가끔 찾았는데 오스트리아 브랜드였다. 비엔나에서는 독일에서는 볼 수 없던 Radler를 제외한 다른 종류의 맥주들도 많이 있어서 기본 맥주를 먹었고 쓰지 않고 순한 맛이 독일 그 어떤 브랜드보다도 나았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점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보다도 현금결제만 받는 식당들이 많아서 ATM에서 돈을 뽑아야 했다. 내 카드가 한국 카드라 먼저 언어선택 화면이 나오는데 독일어 옆에 국기가 오스트리아 국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조합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오스트리아에서 본인들이 쓰는 언어에 자기 국기가 있는 게 당연하다. 이걸 보고 영국사람이 영어와 관련해 영국보다 미국이 더 쉽게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 이런 느낌이 들까 생각했다. 어쨌든 신선했다.
2일 차는 하루종일 통역일정이 잡혀있었다. 먼저 오전에 기관의 빈 대법원 방문이 있었다. 대법원 판사 한 분, 대법원장 담당 공무원 한 분과 컨퍼런스를 진행하고 법원 건물이나 역사에 관한 설명을 듣는 일정이었다. 법조용어가 필요하다 보니 기관 측에서 질문지를 미리 보내주셔서 나름 도움이 되었다. 대화가 길고 전문적이라 힘든 축에 속하는 통역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했던 수많은 통역 중에서 내용면에서는 가장 재미있었다. 또 개인적인 여행 일정이라면 들어와 볼 일이 없는 법원 건물이나 내부 재판정들을 구경할 기회가 있어서 좋았다. 판사가 공보판사 역할도 같이 하는 모양이라 법원의 역사에 관한 설명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법원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기 전에 비가 와서 활동이 제한되는 관계로 기관 측 사람들과 같이 유명하다는 카페로 향했다. 나는 커피도 좋아하지 않고 여행하는 소중한 시간을 카페에서 멍하니 보내고 싶지 않아서 아무리 유명하다는 카페도 가지 않는 편이지만 어쩌다 보니 유명한 줄까지 서서 들어가는 유명한 카페에 들어가게 된 꼴이다. 사실 이곳은 전날에도 몇 번 가게 앞까지 서 있는 줄을 보고 뭐 저렇게까지 하면서 커피를 마시나 하고 지나쳐간 곳이었다. 비엔나에서 유명하다는 아인슈패너 커피와 Apfelstrudel 등의 디저트를 먹었는데 역시 커피 맛을 몰라서 별 감흥은 없었다. 일정 중간에 동행한 거라 내 돈 내고 먹는 게 아니었지만 한 잔에 만원이 넘는 커피 가격은 사악하게 느껴졌다.
오후는 빈 유엔본부 견학일정이었고 이번에는 영어로 진행되는 설명을 통역했다. 사실 전문적이었던 대법원 일정에 비해서 유엔 일정은 민간인들을 위한 견학 프로그램이라 통역은 쉬웠다. 그래도 하루종일 떠들어대려니까 막판으로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계속 서있다 보니 허리도 아팠다. 어쨌든 여기도 내용은 재밌어서 나도 가볍게 관광하는 느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일정이 다 끝나고 기관 측에서 통역비에 작은 선물까지 준비해 주셔서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대학원 지원 때문에 원서비가 많이 깨질 예정인데 그래도 이번 통역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자연스럽게 자금이 다 떨어지면 그만 둘 세계여행 기간도 늘어날 수도 있겠다.
빈에서 나머지 이틀은 쇤브룬 궁전, 벨베데레 궁전을 방문하고 날씨가 좋아서 시내 공원을 찾아다니며 산책하며 보냈다. 쇤브룬 궁전은 명성에 비해서 내부가 그렇게 화려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또 29유로나 하는 티켓 가격에도 내부 사진촬영이 불가능한 점도 별로였다. 오디오 가이드가 입장료에 포함이라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점은 좋았지만 가성비는 많이 아쉬웠다.
오히려 벨베데레 궁전은 상궁의 미술관만 관람하게 되면 16.7유로로 비엔나 치고는 괜찮은 가격이고 작품들도 괜찮은 편이었다. 확실히 취향에 따라서 재미없는 시대 작품은 과감하게 스쳐가고 흥미로운 작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니 훨씬 관람이 알찼다. 예전에는 모든 그림을 보려다 보니 중반이 지나가면 지쳤는데 이제는 관심 없는 낭만파 이전, 모더니즘은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19세기말~20세기 초 작품에만 집중한다. 이곳 미술관에는 특히 클림트의 작품들이 유명한데 초상화를 그려놓은 방식이 얼굴은 세밀하게 표현하면서 배경은 추상화 같은 느낌이라 콜라주를 한 작품 같은 느낌도 들며 신선했다.
결국 먹으려던 오스트리아 음식도 한 끼 했다. 유명한 비엔나 식의 송아지 고기로 만든 슈니첼과 프란츠 요세프 1세가 즐겼다는 타펠슈피츠를 먹었는데 역시 별로였다. 특히 타펠슈피츠는 모르고 시켰는데 물에 삶은 소고기 요리였다. 유럽애들은 이런 걸 진심으로 맛있다고 먹는 건지에 대한 의문은 10년이 넘게 지난 아직도 풀리지 않는다.
그나저나 한국사람은 최근에 갔던 그 어떤 도시보다도 많았다. 한두 명씩 다니는 사람들도 걸어 다니다 보면 계속 마주치고 유명한 관광지에는 패키지로 온 사람들이 넘쳤다. 어쨌든 비엔나는 지금 도시 전체가 가을 분위기가 많이 나서 더 그렇겠지만 생각보다 많이 좋았다. 특히 구시가지만큼은 런던보다도 크고 유럽느낌이 많이 났다. 다만 물가가 사악한 점은 아쉬웠다. 그나마 통역비 덕에 여유 있게 다닐 수 있어서 조금 더 즐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