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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Feb 20. 2024

[세계여행] D+227 방콕

아무런 기대도 없었고 예상대로 실망스러웠던 방콕

말레이시아가 동서로 긴 영토 탓에 특이한 시간대를 사용해서 페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했지만 시간은 오히려 1시간 늦어졌다. 태국은 라오스를 가는 비행기 동선상 경유지로 들르는 느낌이라 지역이동 없이 방콕에서만 5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방콕 공항에 내려서 늘 그렇듯 짐을 찾고 유심을 사며 여행을 준비했다. 스리랑카에서 모기 물린 상처가 덧난 게 한 달째 아물지 않고 있었는데 공항에서 실수로 발로 상처 부분을 차는 바람에 상처는 다시 뒤집어지고 테두리에 물집까지 잡혔다.


방콕의 첫인상은 포화된 도시의 느낌이었다. 특히 숙소가 있던 카오산 쪽은 전형적인 관광업에 잡아먹혀버린 도시의 모습이었다. 한국인과 서양 관광객들이 특히 많았고 오히려 태국인들을 구경하기가 더 힘든 것 같았다. 몇 차례 적었듯이 나는 동남아 여행이 기대도 되지 않고 불편하다.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 것뿐만 아니라 기저에 자기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깔린 채 하는 행동들이 발현되는 여행지에서 그런 사람들과 같은 한국인으로 묶이는 게 싫다. 유럽에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죽은 채로 돌아다니면서 물가가 저렴한 동남아에서는 떵떵거리며 다니는 게 꼴 보기 싫다. 또 현지인들이 생계를 위해 그런 보이지 않는 위계관계에 자발적으로 종속되거나 반대로 기회를 엿보면서 돈 쓸 준비가 되어있는 여행객들을 등쳐먹는 것도 보기 힘들다. 카오산은 내가 불편해하는 이런 분위기가 극에 달한 곳 같았다. 


첫날은 숙소에 도착하니 금방 해가 져서 간단히 두 시간 정도 정처 없이 돌아다녔는데 동남아 답게 곳곳에 불교사원이 있으면서 동시에 왕정국가 아니랄까 봐 온 도시에 왕가 일원들의 사진이 붙어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강변을 따라 걷다가 싸남 루앙에서 석양을 봤다. 말레이시아에 비해 공기가 더러워서 빛이 잘 산란되는 탓인지 노을은 꽤나 아름다웠다. 



다음날은 방콕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왕궁을 방문했다. 행정시설과 종교시설이 결합된 장소였는데 모든 건물들에 금칠이 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명하다는 에메랄드 불상은 그 역사적 중요성을 잘 모르고 정서적으로도 공감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왕궁은 우리나라 궁궐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이고 화려했다. 국교가 불교인 왕정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국력을 궁에 쏟은 듯했다. 다만 전 세계에서 연간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도시에도 메인 관광지인 만큼 정말 사람들이 많았고 또 정말 더웠다. 그래서 쾌적한 날씨면 1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 이곳을 2-3시간 동안 수시로 쉬어가며 천천히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태국의 역사에는 정말로 관심이 없어서 공부를 하고 가지 않았지만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이 건물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싼 입장료값은 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1인당 18000원씩 하는 입장료로만 얼마의 수익을 낼지 궁금해졌다. 물론 우리나라의 문화재들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겠지만 세계여행을 하면 할수록 얼마나 한국에 볼 게 없는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 


왕궁 티켓에는 궁 안에 있는 두 군데의 전시관과 방콕 외곽에 있는 몇 개의 박물관들, 그리고 근처 공연장에서 진행하는 태국 전통춤 공연까지 포함되어 있다. 왕궁 안 박물관들은 객관적으로 볼 것도 별로 없고 너무 더위에 지친 상태라 전시물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궁을 나서서 셔틀버스를 타고 전통춤 공연을 보러 이동했다. 공연장이 시원한 실내인 것은 좋았지만 공연 자체에서 또 불편함이 느껴졌다. 공연이 진행되는 30분 내내 이 불편함의 이유에 대해 생각하며 관람했다. 나는 한 나라의 문화가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전시되고 소비되는 게 싫다. 내가 유난을 떠는 걸 수도 있지만 여기서도 돈을 쓰는 외국인들이 갑이 되고 그 앞에서 고객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이 깃든 춤을 상품화해 파는 현지인들이 을이 된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 와중에 촬영 금지임에도 불구하고 공연 내내 사진과 영상을 찍어대는 무례한 관광객들과 아이들이 앞 좌석을 발로 차고 뛰어다니는데도 제제하지 않는 부모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방콕과 라오스여행 내내 비슷한 분위기가 이어져서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덥고 힘들었지만 왕궁에 들어가려고 긴바지도 입었겠다 내친김에 근처에 있는 왓포 사원까지 방문했다. 전체적으로는 왕궁과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총 몇백 개는 될 것 같은 다양한 크기의 수많은 불탑들과 엄청나게 거대한 금색 와불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도 왕궁보다는 훨씬 적어서 조금 더 여유롭고 쾌적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사원의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과는 별개로 부처가 이렇게 금칠을 해놓은 사원들이나 불상들을 보았다면 과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나 같으면 왜 빈자를 돕는 대신 대신 이런 장식에 힘과 재원을 낭비하냐며 호통을 쳤을 것 같다. 하루종일 더위에 많이 걸어 다니느라 녹초가 되었고 에어컨이 없었던 숙소에서 더위와 싸우며 신선할 정도로 답답했던 아시안컵 4강전을 합격한 대학원 지도교수와 화상미팅을 가지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방콕 3일 차에는 숙소를 옮기는 김에 저녁까지 쉬다가 해가 진 후 조금 더 한적한 카오산 윗동네를 산책했다. 확실히 정신없고 특색 없는 카오산 쪽과는 다르게 현지인들의 주거지역과 섞인 윗동네 골목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중간중간 눈에 띄는 동남아식 불교사원들만 제외하면 옛날 서울의 주택가 골목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걸어 다니다 대로변에서 마주친 구조물은 민주기념탑이라는데 아직까지도 왕실모독제가 존재하고 곳곳에 로열패밀리의 사진이 걸려있는 태국의 모습과의 대비가 아이러니했다. 해가 지니 더위도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아서 생각보다 긴 동선으로 도시의 야경을 즐겼다. 조명이 들어온 사원과 건축물들 옆으로 산책하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관광객이 조금만 덜 오고 조금만 조용해지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동시에 들었다.



다음 날에는 버스를 타고 카오산을 벗어나서 시암지역을 구경했다. 먼저 도착한 룸피니 공원은 물도마뱀 몇 마리가 보이는 것 말고는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공원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와 별개로 한낮의 땡볕 아래서 걸어 다닐만한 곳은 아니었다. 공원을 벗어나 쇼핑몰들이 들어선 시내를 구경했다. 쇼핑몰들 안에는 음식점, 화장품 가게를 비롯해 성형외과까지 한국 브랜드들이 정말 많아서 여기가 태국인지 한국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나름 유명하다는 쇼핑몰들이 모두 근처에 있어 다 들어가 볼까 했지만 한두 곳을 도니 비슷비슷하고 딱히 재미가 없어서 역시 특별히 볼 것 없었던 방콕 예술문화센터를 돌아본 뒤 더위에 지쳐 숙소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버스는 에어컨은 당연히 없고 사람들이 꽤나 많아 서서 가는데 더위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방콕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더위고 실망스러웠던 건 음식이었다.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 태국음식에 열광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저렴한 식당 중에서도 평점도 좋고 유명하다는 곳들을 찾아갔는데 내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다른 곳들의 음식에 비해서 도드라지는 신맛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먹을 것 없는 남미와 스리랑카에서도 별생각 없었는데 워낙 음식이 맛있었던 말레이시아를 거쳐오니 입맛이 까다로워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날에는 이 더위에 먼 곳은 가고 싶지 않고 근처에 보고 싶은 것도 딱히 없어서 그냥 국립박물관에 들어갔다. 전시관이 시원한 것은 좋았지만 전시물품들이 대부분 비슷한 불교미술 작품들이라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럽에서 오래 살다 보니 성당과 기독교 미술에는 웬만해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스리랑카부터 이어지는 불교문화권들을 거치며 사찰들과 불교미술에도 비슷한 감정이 드는 것 같다. 그럼에도 굉장히 정교한 작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듯한 상아 공예와 온통 금으로 뒤덮인 행사용 왕실 바지선은 기억에 남는다.


다음날 식사를 하고 1시간 동안 끊임없이 의심하며 기다린 끝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며 방콕 여행을 마무리했다. 귀국 비행기도 이미 잡아놓은 상태에서 여행지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엄청난 더위까지 더해지니 처음으로 방콕에서 여행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래서 방콕 여행기도 이전 열정과 흥미가 가득하던 때 쓴 글과 비교해 보면 분량이나 디테일함이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말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마지막 나라인 라오스에서 일주일을 보내면 8개월간의 세계여행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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