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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Mar 11. 2024

이대남 비하를 멈추고 계급정치로 나아가자

이대남을 만든 건 민주당의 무능이고, 해결법은 청년정치를 버리는 데 있다

최근 민주진영의 한 전직 국회의원과 식사자리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이날 대화의 화두는 단연 청년정치였다. 유시민 전 장관이 100분 토론에서 최근 했던 청년들의 정치 무관심에 대한 발언을 시작으로 이대남의 보수화 현상과 청년들이 원하는 사회의 이상향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시간 여가 훌쩍 지나갔다. 그 의원이나 다른 참석자들과 생각이 비슷한 부분도, 전혀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확실히 민주당 쪽 사람들이 청년세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이후에도 며칠간 이 주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이제는 조금 정리가 되어 이대남 현상과 청년정치에 대한 글을 남기려 한다.


유시민이 청년들의 정치 무관심에 대한 해결방법을 묻는 방청객에게 했던 대답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청년들 본인들이 애초에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 그 무관심을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대신 그 무관심이 불러온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들의 몫이다. 동석한 의원이 이 발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물었을 때 나는 직관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발언이라고 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심정적으로는 공감이 갈지 몰라도 나는 정치인이 (유시민은 민주진영에서 가장 큰 스피커인 만큼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여전히 정치인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유권자 탓을 하는 것만큼 미련하고 전략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 짓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무지하고 무관심한 대중을 상대하더라도 그들을 설득하고 표를 얻어오는 행위가 정치의 미덕이다. 내게 돌아온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내용에는 공감한다고 했으니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 메시지를 청년들에게 전해주었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깔끔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생각하며 내린 결론은 이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시민의 대답과 이 전직 의원의 질문 모두 청년정치의 함정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대남은 어떻게 보수화했는가?


민주진영 사람들이 청년세대를 보며 가장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청년층의 급격한 보수화이다. 어쨌든 민주화를 일궈낸 자신들이 독재의 잔당들인 보수세력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상태에서 전후세대 중 가장 풍족하고 배움의 수준도 높아야 할 젊은이들이 보수세력을 지지하는 현상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세대의 성장 과정에서 민주화 세대와의 차이를 찾아내고 그것을 청년층의 보수화의 원인으로 꼽는다. 이를테면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며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는 대신 일찍부터 컴퓨터 게임을 즐기며 개인주의와 무한경쟁에 노출된 젊은 세대들이 정치적 대의나 이상향을 위해 투쟁하기보다 개인의 안녕만을 좇게 되면서 자연스레 경쟁과 능력주의를 지향하는 보수 이데올로기와 손을 잡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야 있지만 이는 결정적인 현상 하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바로 청년세대 전반이 아닌 일부 남성들, 즉 이대남만이 보수화를 겪었다는 일이다. 또, 이대남의 보수화는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에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인 2017년 6월의 20대 남성 지지율은 87%를 기록했다. 아무리 정권 초기 허니문 기간이라고 해도 젊은 남성들이 성장배경 탓에 구조적으로 보수 친화적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수치이다. 조금 더 긴 기간을 살펴보자. 2017년 6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20대 여성 지지율은 94%에서 61%로 떨어지며 다른 세대와 비슷한 하락폭을 보인 반면 20대 남성의 지지율은 87%에서 38%로 급락한다. 민주진영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결국 이대남의 보수화는 젠더갈등과 그 과정에서의 민주당 정권의 실책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 와중에 진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라는 한겨레는 최근 "'이대남'이 이상해진 이유"라는 타이틀을 붙여 이 차이를 젊은 여성들이 '연대 서사'를 건설하는 동안 젊은 남성들은 '피해 서사'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헛소리를 실었다. 민주진영의 절망스러운 현실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대남의 보수화는 미국 러스트벨트의 백인 노동자들이 기성 정치세력, 특히 민주당에서 등을 돌리고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는 과정과 굉장히 닮아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육체노동을 했지만 몇십 년 동안 제도권 정당들에게서 돌아오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외면 혹은 '그러게 공부나 좀 열심히 하지' 따위의 냉소였다. 그러던 와중에 pc 바람이 불었고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특권층으로 취급받으며 비난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들은 pc세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민주당에 대해 분노하고 본인들의 억울함을 최소한 인정이라도 해주는 트럼프 같은 비제도권 정치인들에게서 탈출구를 찾는 것이다. 이대남도 똑같다. 8~90년대생 한국 남자들도 어릴 때부터 남성은 특권계급이고 여성은 사회적 약자라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남자라는 이유로 더 많은 체벌을 당하고, 똑같은 시급을 받는 알바를 하면서도 남자라고 힘쓰는 일을 도맡아 해야 하고,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자 동기들이 취직하고 해외여행을 다닐 동안 2년 가까이를 폭력과 부조리가 합리화되는 군대라는 집단에서 허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들이 특권층이 아니라 오히려 차별받고 있는 집단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런 와중에 2015년경부터 한국식 왜곡된 페미니즘이 득세하며 자신들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성범죄 가해자로 치부되고 페미니즘에 어떠한 이유로든 반대하면 마치 못 배운 사람인양 취급을 받게 되면서 페미니즘에는 혐오가, 그들을 비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민주당에는 분노감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러스트벨트 노동자들의 반 pc화와 한국 이대남의 반페미니즘화는 민주세력들이 쉽게 폄하하듯이 무식하거나 틀린 것이 아니라 그들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


정치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싸움이다.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정할 때 어떤 계기로든 처음 느낀 호감, 비호감 여부가 가장 결정적이고 그 후에 붙는 논리들은 감정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과정이다. 이대남은 본인들이 느낀 박탈감, 특히 군 문제를 건드려주는 이준석이나 홍준표 같은 정치인에게 자연스레 끌리고 그들이 던져주는 논리들을 흡수해 본인들의 정치적 이상향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오히려 이준석이 아닌 본인들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극단적 여성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민주당이 얄팍한 성별 갈라 치기를 통해 표를 끌어오려는 세력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이준석을 갈라치기형 정치인이라고 아무리 비난해 봐야 소용이 없던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높았던 이준석의 지지율이 그가 주장하는 능력주의에 대한 이대남의 호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다. 성차별 문제를 건드려준 이준석에 대한 감정적 지지가 먼저이고 이준석표 능력주의 체득화가 추후 논리적 정당화 과정에서 나온 결과다. 똑같이 친페미니즘 성향 민주당에 대한 분노가 먼저이고, 한번 밉보이니 조국으로 대표되는 능력주의적 관점에서의 불공정, 진보적인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 따라오는 것이다. 이미 보수화된 이대남이 페미니즘을 혐오하고 민주당에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민주당의 외면과 반페미니즘 정치인들의 손짓이 그들을 보수화한 것이다. 이대남의 보수화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그들 자신, 또는 막연한 사회구조가 아니라 민주당이 행해온 정치에 있다.




청년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사회는 무엇인가? 청년들은 왜 어떤 정치세력이 진정으로 본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는가?


동석한 전 의원이 답답해했던 부분은 또 하나 있다. 청년들을 위해 정치를 하려고 해도 도무지 그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청년들끼리 치열한 토론을 거쳐 원하는 방향을 그려내고 정치권에 요구해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며 민주화라는 대의로 뭉친 민주화세대와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대남이 원하는 사회는 분명하다. 남녀가 병역의 의무를 포함한 모든 부분에서 때로는 기계적 평등처럼 보일지라도 동등한 의무와 책임을 지는 사회이다. 이대남들은 지속적으로, 또 분명하게 이러한 요구를 해왔고 민주진영이 진지한 고민 없이 그들에게 '너희들의 얄팍한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성평등을 왜곡하지 말라'거나, '본인들의 피해 서사에 갇혀 약자를 공격한다', '남자 새끼들이 쪼잔하게', '우리도 해 왔고 어쩔 수 없으니 너희도 잔말 말고 희생하라' 등의 조롱 섞인 대응으로 일관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대남에게 그것을 넘어선 사회경제 전반에 대한 이상은 없다. 애초에 사회경제적 이념이 아닌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 결집했으니 성평등 문제만 해결되면 존재 의미가 없어지는 집단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비정한 능력주의 등 다른 사회경제적 이념을 덧씌워 공격하는 것은 억지이고 통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전후세대에게 경제발전과 반공이 그랬고 민주화세대에게 민주화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성평등 문제가 지금의 젊은 세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아니다. 실제로 보수 커뮤니티에서 흔히 보이는 전형적인 이대남들의 수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적다. 사회에서 가장 무작위적인 샘플이 모이는 군대를 예로 들어보자. 내가 속해있던 중대 인원수가 80명 정도 되었고 그중 뉴스를 보고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많아봐야 서너 명에 불과하다. 이들이 모두 적극적인 보수라고 가정해도 전체 남성의 5퍼센트에 불과하다. 청년층 전체에서 여성들과 진보 측 남성들까지 생각한다면 이대남은 정말 목소리 큰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청년층의 시대정신이라는 게 존재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그 전직 의원이 청년들을 본인 세대와 비교하며 느끼는 답답함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세대가 느꼈던 동질감과 목표의식은 그들 세대에 속하지 않으면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공공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두 독재자가 설치니 자연스레 '옛 세대 독재자들'에 대항한 '새 세대'가 이끄는 혁명이 시대의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목표를 지우면 민주화세대 전체가 공유하는 사회경제 이념적 합의의 폭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NL 운동권과 일부 노동세력은 어쩌면 또 다른 독재로 귀결될 소련식 사회주의를 원했고 엘리트층은 미국식 시장경제를 원했다. 그리고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만 달성하면 그 이후의 경제와 사회는 마법이 벌어진 것처럼 막연하게 정의롭고 평등하게 잘 굴러갈 거라는 기대감 이상으로 발전된 이상향을 가지지 않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정의와 평등의 정도와 포괄성은 본인의 경제적 계급에 따라 달랐다.


지금의 청년세대에서 시대정신의 부재는 빈곤, 공산주의 적대세력의 위협, 독재 모두가 해소된 상태에서 맞서 싸울 거대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딱히 개탄할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름 살만한 사회에서 거대악에 맞서는 대신 같은 세대 구성원들끼리 경제적 이득을 위해 명문대 입학, 좋은 일자리 등을 놓고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쟁을 하는 건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당연히 청년들의 삶이 안락한 것은 아니다. 비싼 등록금 탓에 저소득층 청년들은 고등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을 꿈꾸기도 힘들고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들도 저성장 시대에서 과도한 입시경쟁과 취업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대학입학과 취업의 모든 과정에서 민주화세대 때보다 훨씬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경력과 스펙이 요구되고 그 조건을 맞추기 위해 어떤 세대보다도 바쁘게 현실을 살아가는 게 지금의 청년세대이다. 현생이 고되고 바쁜 것도 청년들이 원대한 미래를 그릴 원동력을 빼앗아가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유시민의 한탄 섞인 발언과는 달리 젊은 세대에게 이상향이 없다고 핀잔을 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여러 방향을 제시해 주며 경쟁하는 것이 기성세대와 정치의 역할이다. 아래에서부터 토론을 통해 만들어진 이상향을 정치에 요구하는 방식이 운동권 세대의 것이었다면 그럴 여유가 없는 청년세대에게는 정치가 그려준 이상적인 사회의 모델을 선택하게 만드는 방식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청년층 전체가 만족할 만한 이상향은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은 결국 개개인의 물질적 풍요를 증진시키는 데 있다. 전후세대, 민주화세대, 그리고 지금의 청년세대에서도 나에게 이상적인 사회는 내가 속한 경제적 계급에 의해 달라진다. 20대 재벌 3세, 대학생, 알바노동자, 기초생활수급 가정의 자녀가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이상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미련한 것이 있을까. 그들에게 왜 너희 청년들끼리 연대하지 않고 정치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냐고 꾸짖을 게 아니라 정치에 관심을 가질 시간조차 없는 저소득층 청년들에게 윗세대 저소득층과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청년 간 연대가 아니라 계급 내 연대가 답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특권을 누리며 '쉬운 삶'을 사는 젊은이들을 청년세대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약자를 위하는 민주진영이 대변할 필요는 없다. 저소득층 청년은 저소득층이기에 약자이지 청년이기 때문에 약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민주진영에서 잊을만하면 나오는 청년정치가 싫다. 선명한 계급정치를 회피하기 위해서 약자라는 이미지가 씌워져 있지만 실제로는 경제적으로 너무나 다원적인 여성, 소수자 청년등의 집단을 끌고 와 정체성정치를 하는 것은 당장 표를 모으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너무나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행동이다.


정치는 청년세대를 한 범주로 묶고 실체가 없는 그들 모두가 만족할 정책을 찾아 헤멜 것이 아니라 청년 개개인의 계급의식을 일깨워주고 우리의 정책이 그들의 경제적 지위를 어떻게 향상해 줄 수 있는지를 전달해야 한다. 말만 거창한 '청년공약'들만 남발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책이 지금, 그리고 미래의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더 많은 계층이동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민주진영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그것도 제대로 못 하면서 '청년, 너희들끼리 뭉쳐서 우리에게 요구사항을 가져와'라는 식의 태도는 청년정치의 함정이고 무지와 오만의 산물이다.


동시에 청년의 무관심, 이대남의 보수화에 대한 민주진영의 책임을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많은 청년들이 세월호부터 박근혜 탄핵까지 이어지는 과정에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충분한 정치적 효능감을 느꼈다. 그들 대다수가 너무나 빨리 효능감을 다시 잃어버린 이유는 천지개벽 수준의 개혁을 약속한 문재인정부가 결과적으로는 권력기관, 경제구조, 사회문제 등에서 피부로 느껴질 만한 진보적 변화를 불러온 게 없기 때문이다. 한번 효능감을 경험한 사람들은 효능감이 없다고 느낄 때 실망하며 등을 돌리는 속도도 훨씬 빠르다. 그래서 문재인정부는 개혁의 적기를 놓친 것뿐만 아니라 청년세대를 비롯한 잠재적 정치참여 세력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의 수준을 넘어선 역사와 정치에 큰 죄를 저질렀다.


이대남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배운 게 없어서 저질 보수세력들에게서 문제해결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개혁신당 창당과정에서 드러났듯이 그들은 민주화 세대와 맞먹을 정도의 정치적 고관여층이다. 앞서 적었듯 본인들의 일관된 요구사항에 민주진영이 조롱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말뿐일지는 몰라도 할당제 비판, 여가부 폐지 등 솔깃할만한 이슈를 던져준 보수에 끌리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 '왜 그나마 너희들을 위하는 우리를 놔두고 허황된 말뿐인 저런 저질 보수를 지지하지?'라는 의문을 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젊은 남성들에게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 저런 수준미달 보수들보다도 매력적이지 못하구나'하는 반성이 필요한 시간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유시민의 발언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건 그 발언이 이대남을 향한 발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반이민, 반 pc정서를 가진 백인 노동자증을 향한 비하와 날 선 말들이 그들의 반감만을 불러오듯이 한국의 이대남들을 향한 조롱과 공격도 그들의 이해할 만한 피해의식과 논리를 무시하는 비생산적이고 부도덕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후에 유시민의 발언을 다시 들어보니 이대남이 아니라 청년들 중 정치 무관심층에 대한 발언이었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그 대가도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요지로 내가 왜곡되게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덜 공격적이고 지극히 원론적인 발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더라도 청년층의 정치 무관심이 아니라 보편적인 정치 무관심 층에 대한 직언으로 프레이밍 했다면 더 슬기로운 답변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청년층이 정치, 특히 민주정치를 외면한 것을 그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과열된 경쟁사회와 정치의 부적절했던 대처를 지적, 반성하고 앞으로 대안을 만들어가는 데 열심히 노력할 테니 청년을 비롯한 전 세대의 정치 무관심층의 참여를 부탁했다면 훨씬 '덜 싸가지없고', '덜 꼰대같이' 보이지 않았을까.


민주진영이 이대남의 진보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트릴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쉽다. 이대남이 다른 사회경제적 공통점이 없이 반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뭉친 만큼 그 기반만 제거해 준다면 그들의 보수화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민주진영이 지금처럼 반페미니즘 정서를 가볍게 외면한다면 전후세대의 보수지지, 민주화세대의 진보지지처럼 현 청년세대는 몇십 년 간 공고한 보수화를 통해 민주세력을 외면할 것이다. 모병제든 여성징병이든 병역에 있어서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아젠다를 보수보다 먼저 선점하고 실천을 통해 정치적 효능감을 보여주어야 한다. 병역 문제만 해결된다면 이대남에게도 구심점이 없어지는 만큼 다른 청년층과 같이 그들의 계층적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정치집단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계급정치다. 청년뿐만 아니라 전 세대의 정치 무관심층을 정치로 돌리는 방법은 매력적인 이상을 제시해 가슴을 뛰게 만들고 그 이상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정치의 효능감에 대한 확신을 주는 방법밖에는 없다. 결국 타겟층에 먹을거리를 던져줘야 한다. 누군가는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겠지만 포장하기 나름이다. 현실정치는 현자들이 본인들 중 세상 모든 것에 관한 가장 뛰어난 논리체계를 가진 최고의 현자를 뽑는 과정이 아니다. 결국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 유권자를 상대로 장사를 하고 그렇게 얻은 권력을 바탕으로 약속을 최대로 이행해 가는 과정이다. 현실적인 제약은 충분히 설명하면서도 본인들이 대변하고 싶은 사람들의 최선의 이익실현을 약속하고 가능케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 민주진영이 청년의 표를 얻고 싶다면 타게팅할 집단은 아이러니하게도 '청년'이 아니라 '저소득층'과 '중산층' 계급이다. 문재인 정부와 그 이후의 민주당은 무당이나 따라다니면서 손바닥에 왕자를 그린 채 토론회에 나오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정치검사, 명품백을 준다니 좋아서 넙죽 받아먹는 천박한 그 부인, 상대방 말꼬리나 잡고 허세에 가득 찬 몸짓만을 보이면서 정작 자기 세력의 잘못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 똘마니보다도 이들에게 매력적인 상품을 팔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 민주진영이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하는지 되새겨야 한다. 경제적 약자들의 요구사항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무관심해 보인다면 조롱과 한탄 대신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민주진영이 대변해야 할 청년층의 관심과 지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청년정치를 버리고 계급정치로 나아가야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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