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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남편이 쓰러졌다.

왜 소중한 건, 잃고 나야 깨닫는 걸까.

by 심연

지난 10월은 올 한 해 중 가장 바쁜 달이었다. 추수의 계절인 가을답게 나도 연중 뿌린 씨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런치 팝업전시에,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 준비, 그림 공모 준비에 그림 전시 초대까지, 이미 다녀온 행사만 그렇고, 앞으로 갈 행사와 약속도 줄줄이었다. 그림 공모전 쫑파티에, 친구들 송년회, 그리고 독서모임까지. 거실에 걸린 가족 공용 달력만 봐도 이 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누군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남편 : "나 다음 주 화요일 병원 간다."

나 : "다음 주 화요일? 나 그림 모임 쫑파티 하기로 했는데..."

남편 : "그럼 수요일에 갈게"

나 : "수요일? 나 오전에 그림 수업 있잖아..."


너 진짜 너무 한 거 아니냐?


남편이 폭발했다. 약속을 잡을 때마다 남편에게 미리 얘기했었는데, 갑자기 처음 듣는 양 화내는 남편이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내가 밖에 정신이 팔려, 집 안을 돌보지 않는다고 했다. 억울했다. 난 약속 이외의 시간엔 육아와 살림에 열정을 다하는 자칭 슈퍼우먼인데 말이다.


우리는 얘기를 하면 할수록, 조율은 안 되고, 마음만 상했다. "이번에 잡힌 약속까지만 나가고 안 나갈게"라는 내 말에도 남편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남편은 "그게 뭐가 중요하니?"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대단하다며 치켜세워주는 그 성과들이 남편에게는 하릴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남편이 바라는 건, 밖에서 재능을 펼치는 아내가 아닌, 가정 일에 더 관심을 갖고 신경 쓰는 아내였다. 하지만 최근 나의 모습은 그가 바란 이상형과는 거리가 있었다. 남편은 자신이 싫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약속을 잡고 밖으로 나가는 나를 못마땅해했고, 나는 전시와 연말이라는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해주지 않는 남편이 서운했다. 그렇게 우린 한동안 평행선을 걷듯 냉랭하게 지냈다.


그리고 며칠 뒤, 시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이 병원에서 쓰러졌다는 연락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 갑자기 머리의 모든 사고회로가 멈춘 듯,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분명 아침에 어머님과 등산하고 온다며 나간 남편이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쓰러지다니.


어머님 말에 따르면, 남편은 등산이 아닌, 어머님 동네 치과에 가서 임플란트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치료가 끝나고 엑스레이 촬영을 하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다행히 수분 내로 의식은 회복했지만 여전히 컨디션이 저조한 지, 지금은 어머님 댁에서 자고 있다고 했다.


어머님은 속상한 마음에, 내게 어제오늘 남편의 컨디션을 물었다. 밥은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최근 피곤해하진 않았는지, 스트레스받는 일은 없었는지 구체적으로 요목조목 따져 물었다. 남편은 괜찮았다. 최근 신경치료가 잘 못돼 임플란트를 알아보며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그 정도로 쓰러질 건 아니었다. 난 놀란 마음을 잠재울 틈도 없이, 쏟아지는 어머님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려 진땀을 뺐다.


어미야, OO(남편)한테 신경 좀 써라...


어머님은 눈물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내게 남편을 잘 챙기라고 했다. 핸드폰을 통해 넘어온 그 목소리가 너무나 날카로워 고막을 뚫고, 정확하게 가슴에 꽂혀 박힌 듯했다. 어머님의 말씀이 마치 건강한 자신의 아들이 쓰러진 건, 남편을 잘 보살피지 않은 내 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10여분의 통화로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놀람과 슬픔, 억울함과 자책감이 한 번에 밀려왔다. 통화가 끝나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소파에 기대앉는데, 얼굴선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의 말이 맞았다. 브런치든 그림 전시든 다 부질없었다. 주위에 반짝이는 것들을 잡으려 애쓰다가, 난 정작 옆에 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남편이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으니, "제발 나가지 말고, 집에 좀 있어"라고 했던 남편이 말들이 아프게 떠올랐다. 왜 그땐 남편의 호소 어린 부탁을 그저 그런 잔소리로 여기고 흘려 넘겼는지... 일이 터지고 나야 뭐가 중요한지 깨닫는 자신의 어리석음이 원망스럽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상처만 준 것 같아 남편에게 미안했다.


연말까지 잡아놓은 모든 약속을 정리했다. 사회적 체면 때문에 왠지 약속은 취소하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세상에 취소하면 안 되는 일정은 없었다. 남편이 아프다고 하니, 친구 모임도, 독서모임도, 쫑파티도 모두 상황을 이해해 줬다. 남편이 아프면 당연히 곁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너무나 당연한 그 사실을, 나만 몰랐다.


달력 한 장을 빼곡히 채웠던 일정이 다 사라졌다. 약속이 사라지니, 우리 사이에도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함께 얼굴 보며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웃는 일도 많아졌다.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10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이했다. 근처에 새로 생긴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자며, 옷을 챙겨 입던 중 집으로 꽃바구니가 배달됐다.


그래, 남은 90년도 파이팅!ㅋㅋ

세상에, 꽃바구니를 보낸 사람에 놀라고, 꽃바구니에 적힌 문구에 크게 웃었다. "10년 동안 고생했네~ 앞으로도 파이팅!, 김 OO(남편이름)". 투박하고 담백한 그 문구는 남편과 꼭 닮아있었다. 결혼기념일 단골 멘트인, '고마워, 사랑해'란 단어 없이도 충분히 그의 묵직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문구를 쓰려 얼마나 고민했을지 상상이 돼 웃기면서도, 고맙고 사랑스러워 눈물이 났다. 이렇게 반짝이는 사람을 내 옆에 두고서, 난 무슨 반짝이를 찾아 헤맸나 싶었다.


10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아, 나도 우리 집 반짝이에게 한 마디 해야겠다. "남편, 10년 동안 내 편으로 든든히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90년도 우리 같이 사이좋게 잘 지내자! 항상 고맙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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