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리서치인턴
지도교수님이 올해 하반기에 미국 탑스쿨로 옮기시게 되었다. 미국 중심의 학계에서, 그것도 미국 탑스쿨로 자리를 옮길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기회라서, 교수님께서도 그렇게 결정하신 듯했다. 하지만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교수님은 원격으로 지도해주고 인건비나 졸업도 책임지겠다고 하셨지만, 교수님이 학교에 안 계신 상태에서 빨리 졸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졸업요건도 이미 충족되어 있었기에, 올해 빨리 졸업하기로 합의했다. 석사와 박사를 합쳐 정확히 5년 걸린 셈이라, 조금 빠른 편이긴 했다.
1학기에는 박사수료를 마치고, 2학기에는 디펜스를 한 후 졸업하는 일정이었다. 사실 디펜스를 1년 동안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넉넉했다. 그래서 졸업 전까지 남은 시간을 알차게 쓰고 싶어서, 이때 인턴을 한 번 더 해보기로 했다.
해외 빅테크 기업도 몇 군데 지원해봤지만 전부 서류 탈락이었다. 국내 회사 세 곳에도 지원했는데, 퀄컴코리아는 답변이 없었고, 구글코리아 ML 엔지니어 인턴은 면접에서 떨어졌으며, 네이버만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내가 일했던 곳은 NAVER AI Lab(네이버 AI랩)이라는 작은 조직이었다. 정직원 수가 많지 않고, 몇 달씩 머물다 떠나는 인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은 말 그대로 AI를 연구해서 논문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는 팀인데, 국내 민간 기업 중 오로지 ‘논문’만 써도 되는 조직은 아마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규모도 작았다.
그래서 “대기업에서 논문만 쓰는 인공지능 연구원이 될 거야”라는 생각이 얼마나 실현하기 어려운지, 젊은 친구들이 알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기업에서 연구원이 논문을 쓰는 경우는 있지만, 정말 ‘논문만’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저런 것을 희망하는 친구들은 과연 이 열 명 남짓한 그룹에 속할 만한 실력을 갖출 수 있을지 스스로 따져봐야만 한다. 이곳 시니어 연구원들의 역량은 웬만한 메이저 대학 교수급이고, 실제로 정직원 중에는 교수로 자리를 옮긴 분들도 꽤 된다.
네이버 AI 랩에서는 지원자가 인턴으로 뽑히려면, 그를 케어해줄 멘토가 먼저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일하겠다”고 나서야 했다. 운 좋게도 나를 멘토해주실 분이 계셔서 합격할 수 있었다. 이후 네이버에서는 전적으로 멘토님과 함께 연구했는데, 사실상 연구라기보다는 매주 멘토님께 뼈아픈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었다. 물론 나 혼자라면 논문을 쓸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멘토님이 지적하는 부분이 정말 하나도 틀린 게 없었고, 그 방식대로라면 더 나은 논문이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타일이 나와 다소 맞지 않더라도, 이 거대한 벽을 꼭 부숴보고 싶었다.
멘토님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길 원했다.
1. Goal: what is the problem we are tackling?
2. Existing works: how do “most recent” prior works tackle this problem?
3. Main challenge: what is the challenge that recent works fail to solve, but our method can solve?
4. Our method, with focus on solving 3: what is our method, and why does our method solve the main challenge?
5. Expected experimental results: how to show that our method indeed solves the challenge?
이 중 비어 있거나 잘못 짚은 부분이 있으면, 미팅이 중단되거나 날카로운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크래프톤 때와 달리 네이버에서는 인턴 업무에만 몰두할 수도 없었다. 연구실에서 진행하던 연구를 마무리해야 했고, 동시에 졸업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겐 이때가 대학원 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대학원 첫 학기를 이렇게 시작했다면, 아마 중간에 관두거나 석사까지만 하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인턴이 진행되면서 자신감이 떨어졌고, 몸과 마음이 동시에 피폐해졌다. 지금까지 온실 속 화초처럼 연구해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결국 네이버에서는 논문을 완성하지 못했다. 힘든 경험이었지만, 덕분에 그동안 내가 나이브하게 생각해온 부분들을 더욱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큰 무기가 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네이버에서 만나 소중한 인연들을 얻은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다.
아, 그리고 네이버 1784 건물 지하에는 콜드브루를 Hot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뜨겁게 주세요” 같은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