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_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여유가 느껴지는 제목이다.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내 말이 맞다고 모두가 외치는 세상에서 맑고 크게 울리는 평온한 종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이 책은 나티코, ‘지혜가 자라는 자’라는 법명으로 17년 동안 수행의 삶을 산 저자가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와서 강의를 통해 국민들에게 전해준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어. 내가 다 알지는 못해'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확실하게 행복해질 방법은 흔치 않습니다.
- 토마스 산체스, <둥근 달을 명상하다> 中
작가는 20대에 다국적 기업 임원까지 오르면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사회적 성공’을 거뒀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고 태국 숲속의 사원으로 홀연히 떠난다. 젊은 나이에 남들이 우러러볼 만한 사회적 위치에 올라간 것도 놀랍지만, 그 위치에서 낙하하듯 수행의 길로 들어선 것은 더 놀라웠다. 책 초반에는 숲속 승려의 이러저러한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수행을 오래 한 저자가 명상하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다고 고백하는 부분은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나만 머릿속이 복잡한 것은 아니구나, 수행자 역시 그렇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위로되기도 했다. 이 책은 ‘이렇게 살라’고 명하는 책이 아니라 ‘나도 이렇다’라고 고백하는 쪽에 더 가깝다. 책 표지에 ‘지혜’라는 단어가 많아서 조금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면 부담을 조금 덜 수 있기를 바란다. 생각보다 가벼운 유머와 인간적인 면모에 공감하며 읽게 되는 책이다.
저자는 깊은 수치심과 좌절을 느꼈던 과거와 자신의 어리석음도 가감 없이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지혜란 완벽함이 아닌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아는 태도’에서 온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고 진솔하게 이야기 해준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당신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우리의 생각을 모두 믿어 버리는 대신에 조금 거리를 둘 수 있으며, 그러는 동안에 우리 내면에 원래 존재하던 지혜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고 조언한다. 불교도로서 인간의 원죄가 아닌 원래의 순수, Original Purity를 믿는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에 마음이 나도 모르게 편안해졌다. 나 또한 저자가 가르쳐준 대로 나의 거친 생각과 거리를 두고 고요히 내 내면을 바라보고 싶어졌다. 각자의 내면에 정교하게 연마된 ‘지혜’ 라는 나침반의 은은한 소리가 들릴 때까지.
우리는 불안해서 머릿속이 시끄럽고, 불안해서 더 큰 소리로 주장하곤 한다. 그래서 스스로와의,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쉽게 갈등하고 지친다.
저자가 영국의 막 생긴 사원으로 옮겨와 그곳의 체계 없음에 대한 불만이 끓어올랐을 때 주지 스님이 건넨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혼돈은 자네를 뒤흔들지 모르지만, 질서는 자네를 죽일 수 있다네.” 저자는 어떤 모습의 세상이 정답인지 다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이럴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손동작을 연습해 보라고 권한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힘을 빼고 활짝 펴는 것이다. 이 간단한 동작으로 우리는 삶에서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다 알아야 하고, 다 맞아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인 것이다. 저자는 그런 비움과 내려놓음, 인정에서 행복이 온다고 이야기 한다.
그가 숲속에서 수행하며 얻은 지혜도 귀하고 위로가 되었지만 내 마음에서 크게 공명했던 부분은 속세에 나온 후의 이야기다. 그는 17년의 수행 후 현실로 나와 명상 강의를 하며 많은 사람들과 지혜를 나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기도 하고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루게릭병으로 자기 죽음을 마주 보게 되기도 한다. 특히 죽음을 마주하며 삶을 통찰하는 여러 글귀는 정말 인상적이어서 오래 기억해 두고 싶었다.
“죽음 뒤에 사라질 그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적어도 살짝만 쥐고 살아가세요. 세상을 살아가기에도, 떠나기에도 좋은 업보만을 남기길 바랍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보통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책에서 그는 죽음과 탄생이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삶은 늘 죽음 가까이에 있으며 죽음 또한 삶의 의미 있는 일부분이라고. 그래서 저자는 죽음 뒤에 사라질 것들은 ‘살짝만 쥐고 살아가기’를 강조한다.
안락사를 선택한 아버지와 함께 스위스의 허가 기관에 가서 그의 죽음을 함께 하는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것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죽음의 준비 과정이 외려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면 모순일까.
죽음에 대해서도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두려워하며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는 것.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파하거나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일까. 누가 공부를 더 잘하는지, 더 좋은 집에 사는지, 더 좋은 직장에 다니는지… 누구보다 열심히 살면서도 타인과의 비교로 삶이 힘든 이 시대의 사람들. 그래서 불안하고 불행하기도 한 사람들. 나 또한 거기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 내면의 알아차림(Awareness)으로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을 아직 100% 체화하진 못하지만, 삶의 태도와 방향을 조금씩 바꿔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떠난다.”
2022년 1월 세상을 떠난 작가의 마지막 말이다. 꽉 쥐었던 주먹을 슬며시 풀라던 그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혁신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책,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그런 종류의 책은 아니다. 하지만 지혜자가 들려주는 소탈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에 생각보다 많은 위로를 받았다. 에세이를 읽었을 때 꾸며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책도 있는데, 이 책은 정말 진솔하고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정글 같은 이 사회에서 온갖 긴장과 두려움으로 힘들다면 흔들리는 내면을 잡아주고 마음의 평화를 선물할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