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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원 Jun 30. 2023

미술심리치료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상처가 어른이 됐다고 아물진 않더라.



계단에서 떨어질 뻔한 4살짜리 아이를 난 왜 잡아주지 못했을까?


  고작 4살짜리 아이였다. 어린이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 중 하나였던 그 아이는 집도 유복했고 온순했으며 선생님 말씀도 잘 이해하고 서투르지만 뭐든지 스스로 하려는 의지가 큰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에게도 '어쩜 저렇게 이쁘게 컸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견하게 느껴지던 아이였다.


  유아교육을 공부하는 내내 훌륭한 선생님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어린이집 실습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선생님이라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실습을 하고 있던 4살 반 아이들이 2층에서 수업을 끝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앞서 말했던 사랑받던 4살짜리 여자아이가 내 옆을 지나치며 내려가는 순간 계단을 헛딛으며 미끄러질 뻔했다.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가던 손을 나도 모르게 황급히 거두고는 당황스러움과 무서움에 얼어붙었다.


  아이가 계단에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꼭 잡았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랬을까?' 아이를 다치게 만들 수 있었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하루종일 그 아이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기분에 연거푸 숨을 몰아쉬곤 했다.



4살짜리 여자 아이에게 질투를 하다.


  한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 가만히 누워 몇 번이고 내가 손을 거두었던 그 장면을 수없이 떠올렸다. 마침내 한 단어가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질투' 그 아이를 질투했던 나도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감정이었다. 질투라는 그 옹졸한 감정이 아이를 다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어린 시절 내가 겹쳐지며 사랑받기 위해 애썼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4살 때 나는 어땠을까? 매일 밤 큰소리로 싸우던 부모님, 귀를 빈틈없이 막아도 들리는 큰소리에 눈물만 흘리며 방에서 웅크리고 있던 작고 어렸던 내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우리 엄마아빠는 저렇게 싸우는 걸까? '저러다 엄마가 가버리면 난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집에 들어가는 길이 늘 불안했고 무서웠다. 서로를 비난하고 늘 같은 문제로 싸우는 부모님에게 내가 없었다면 모두에게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씁쓸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4살짜리 여자아이의 반에서 마음을 쓰이게 만들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남자아이지만 반에서 체구가 가장 작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악을 쓰며 울지만 선생님에게 외면받던 아이, 그렇게 울다 지쳐 구석진 곳에 몸을 뉘이는 그 아이말이다. 더불어 가장 먼저 어린이집에 와서 가장 늦게 가는 아이는 항상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아침이면 항상 그 남자아이에게로 가서 함께 놀아주고 울다 지친 아이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그런데 편애하는 게 눈에 보였던 걸까? 하루는 담임교사가 나에게 "선생님 아이들은 똑같이 사랑을 줘야 해요. 그런데 선생님은 00 이를 편애하는 게 눈에 보여요."라고 말이다.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더 마음이 그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럼 저 아이는 어디 가서 사랑받지? 내가 아니면 여기서 이 아이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라며 말이다.



애정의 결핍이 만든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내가 왜 4살짜리 아이를 질투했을까? 그리고 난 왜 유독 그 체구가 작던 그 남자아이에게 마음이 갔던 걸까? 그때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심리치료를 공부하면서 그 남자아이는 어린 시절 나와 매우 많이 닮아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우울하고 애정결핍이 있던 어린 나와 남자아이를 동일시했고 그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게 느끼던 질투라는 감정을 나도 느꼈다. 예쁨 받는 아이들을 보며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아이의 눈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결국 여자 아이는 자연스레 나에게 질투의 대상이 된 것이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대부분 밖에서도 사랑받으며 사랑받을만한 행동을 보인다. 반면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남자아이처럼 사랑받기 위해 더 질투하고 나보다 사랑받는 대상을 미워하며 그렇게 나를 애정결핍이라는 감옥으로 밀어냈다.


   난 공평한 사랑을 줘야 하는 교사의 자질을 갖출 수 없다고 느꼈다. 소외됐다고 느끼는 음지의 아이들에게만 애정을 쏟고 있는 내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의 결핍을 인정하고 극복하지 못하면 그로 인해 파생된 문제가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교사가 되길 포기하고 학과에서 접한 미술치료를 바탕으로 아동미술심리치료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심리치료 대학원에서 나를 알아가며 애정결핍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이후 초등학교, 지역아동센터, 심리치료센터에서 상처 입은 아이들을 만나게 됐다. 공부를 하고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의 결핍을 마주할 때면 아프지만 기뻤다.

  내가 가진 결핍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결핍을 인정 못하고 괜찮은 척 아닌 척 하기보단 '내 결핍으로 죄 없는 사람을 또 질투하고 내 시간을 갉아먹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히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힘들지 않았다.


  여러분의 결핍은 무엇인가요? 그 결핍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나요? 혹시 특별한 이유 없이 밉고 싫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주변의 긍정적인 평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아마 그 평가 안에 내가 얻고 싶었던 평가가 숨어 있을 수 있을 거예요. 미워하기보다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인정하고 내가 가진 능력에 주목해 보세요. 스스로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결핍 탈출구를 향해 나아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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