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에는 경제적 여유가 없는 대신 넘치는 체력이 있으니까 여행을 계획할 때 '숙소'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행 내내 밖에 나가서 놀테고, 저녁이면 웬만해서는 맥주 한 잔 하고 들어올 테고, 이내 뻗어 잠이 들 테고. 그러니까 숙소는 말 그대로 집 떠나 임시로 머물며 잠만 자는 곳으로 여겼다. 그래서 숙소를 예약하는데 따르는 비용을 아끼는 대신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즐기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삼십 대 중반으로 접어들자 여행이 마냥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보고 듣고 느끼면서 견문을 넓히는 것도 정도가 있지. 특히 해외여행이라면 말 안 통하는 곳에서 혹시나 덤터기를 쓰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해야 하고, 음식을 주문할 때에도 못 먹는 것들이 들어가 있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마음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번역기를 돌려야 할 때가 있고, 또 관광지 간 이동은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지에 대한 검색 등등. 여행 한 번 가려면, 특히나 가보지 않은 나라에 가려면, 미리 알아둬야 하는 것이 존재하며, 이는 여행을 가서도 일정 내내 직접 해결해야 할 것들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뒤로는 여행할 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어쩌면 체력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행에서 숙소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말도 안 되게 커졌다.
숙소는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여행으로 지칠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곳. 체력을 회복하여 다음 날 펼쳐질 또 다른 여정을 즐겁게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곳. 그래서 여행을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숙소 예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혜수와의 나트랑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여행을 계획할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의 게으름 탓도 있겠지만 여행 준비에 시간을 쓸 여유가 생각보다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트랑 호텔 몇 군데 찾아봤는데 여기, 여기 둘 중에 정하자. 어때? 혹시 예산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어?"
혜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신혼여행을 발리로 다녀왔지만, 동남아시아 물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고, '여행에서 숙소는 매우 중요해. 비싼 만큼 가치가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 다녀온 일본 여행 숙소를 생각하며 1박에 15만 원이라는 나름의 예산을 혜수에게 알려주었다.
"1박에 15만 원? 3박에 15만 원이 아니라? 조식 포함된 5성급 호텔을 3박에 15만 원으로도 갈 수 있어."
그녀의 대답에 여행 갈 국가의 물가에 대해 하나도 알아보지 않는 나의 무지함에 놀랐고, 조식이 포함된 5성급 호텔을 5만 원가량으로도 예약할 수 있다는 베트남의 물가에 또 놀랐다.
"혜수야. 네가 정해. 나는 아무 데나 다 괜찮아. 잠만 잘 수 있으면 되지." 나는 답했고, 곧이어 그녀로부터 호텔 예약을 완료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냐짱 해변가에 위치한 높은 호텔. 우리는 그중 33층을 배정받았다. 고층일수록 바다가 더욱 잘 보일 것이므로 운이 좋다고 느껴졌다. 기대감을 안고 숙소로 들어가자 함성이 절로 나왔다.
예상보다 내부는 훨씬 넓어서, 큰 캐리어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도 동선에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침대는 쾌적하고도 푹신해서 여행 중 피곤한 몸을 포근히 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큰 창 앞으로 펼쳐진 나트랑 해변의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33층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나트랑 해변은 가히 아름답다고 말로 표현하기에도 입이 아픈 수준이었다. 해안가에 가까운 곳은 모래사장 덕분인지 옅은 에메랄드 색깔이었는데, 그보다 더 멀리 펼쳐진 깊은 바다는 진한 산호빛이라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저 멀리 나트랑의 놀이동산인 빈원더스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아름다운 바다의 배경이 더해지니 마치 신비의 동산같이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여행 내내 호텔에 머무르며 맥주만 마셔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만족이었다. 3박에 대략 15만 원, 그러니까 1박에 5만 원인 셈인데 우리는 둘이 함께 예산을 모았기 때문에 1인당 약 2만 5천 원. 1박에 2만 원짜리 호텔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신이 났다. 숙소가 만족스럽다면 높은 가격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는 치킨 한 마리 겨우 주문할 비용으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것도 넓고 쾌적하기까지 한 곳에서 3일을 머무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가뿐하게 느껴졌다.
시작이 좋았다. 이 좋은 시작을 계획해 준 혜수에게 더욱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