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이 되었다. 내일 출근을 위해서는 슬슬 잠에 들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고 인스타그램을 켰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무 생각 없이'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목표나 목적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버릇이나 습관에 의해, 마치 척수반사처럼 그렇게 인스타를 켰다.
인스타 속 세상은 환상적이었다. 아니, 환상 그 자체였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남 미녀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국산차는 차 취급도 받지 못하는 곳이었고, 옷과 가방은 기본이 명품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옷과 가방을 가지고 유럽으로, 미국으로 여행 다니고 있었다. 그 세상에서는 모두가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인스타를 켜기 전보다 조금 더 우울해졌다. 세상 모두가 행복한데 나만 불행하고, 나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점점 우울함의 바닷속으로 침잠해 가던 찰나, 기억 저편에서 예전에 봤었던 한 B급 영화가 떠올랐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나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 준 건 '델타 보이즈'라는 영화였다. 제작비 250만 원에 9번의 촬영... B급 영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한 D급 정도 되는 영화였다. 시놉시스는 아주 간단했다. 네 명의 남자 주인공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누가 봐도 '루저'다. 하루 밥 벌어먹고살기도 힘들고, 어디 확실한 직업이나 집도 없는 루저들. 매형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을 하거나, 미국에서 왔는데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고 오갈 데 없거나, 수산시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살거나, 아내와 노점상을 하며 매일 구박받으며 살거나. 정말 별 볼 일 없는 그들이 지역에서 주최하는 남자 사중창 대회에 나가기 위해 노래를 연습한다는 내용이다.별 내용 없는 이 영화는 처음 봤던 그때에도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었다.
왜 그랬을까. 이 영화는 어떻게 나를 항상 우울에서 건져주는 것일까. 이 찌질한 캐릭터들이 모여 놀이터 따위에서 노래 연습이나 하는 게 뭐가 좋다고. 아마 생각건대 그것은 이들이 인생의 B컷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저마다의 인생에서 A컷들만 보여주려 안간힘 쓴다. 비싼 호캉스, 돈 많이 드는 여행, 명품... 한마디로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멋지고 이쁜 모습들. 하지만 SNS에 올리는 A컷들의 수면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B컷, C컷들이 존재한다. 사실 우리네 인생을 구성하는 건 이 B컷, C컷들이다. 나는 항상 내 B컷 C컷들을 보면서 사는데,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A컷만 보인다. 그래서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해 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사실 우리네 인생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위안을 얻는다. 너만 뒤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너만 B급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는 그런 작은 위안. 그래서 나에게 '델타 보이즈'는 아주아주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