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비디 Jul 22. 2023

애정의 형태와 채무관계



장마철이 되었다. 어제도 비가 내렸고, 오늘도 비가 내릴 것이며, 내일도 비가 내린다 했다. 그것도 미친 듯이 퍼부을 것이라 했다. 우리 집 성질 더러운 고양이는 베란다 창가에 앉아 비가 내리는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눅눅했지만, 마음은 산뜻했다.


내 회색 고양이는 여름이 되자 약간 갈색을 띄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아닌 아주 작은 부위에서만 갈색 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앞발의 옆면 일부나, 꼬리 옆 털, 목 아래 가슴의 역삼각형 부분 정도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변화였다. 아무래도 러시안 블루가 아닌 다른 종이 중간에 섞인 모양이었다. 남들이 알아채기 힘든 내 아이만의 사소한 특징들을 발견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기쁜 일이었다. 나는 내 아이를 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애정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바로 무조건적인 사랑과 애정의 형태였다. 녀석이 자동급식기를 박살 내놓아도, 퇴근하고 집에 와 보니 쓰레기통이 죄다 헤집어져 있어도, 시도 때도 없이 내 손과 발을 물어도 나는 녀석을 사랑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녀석을 녀석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고를 칠 때면 당연히 짜증이나 화가 나지만, 그게 녀석에 대한 애정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그에 반해 연인 간의 애정은 좀 더 동등한 관계다. 우린 연인을 연인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힘들다. 사고를 치거나, 나쁜 모습을 보이거나, 나에게 주는 애정이 부족하면 자연히 내가 주는 애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마디로 부모의 사랑은 곧 호구가 되는 것이지만 연인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랑하고 애정을 아낌없이 주되 호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연인 관계에서 더 좋아한다는 것은 빚을 진 것과 같다. 채권자보다 항상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채무자처럼,
더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을 이자로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위 밀당이라는 것을 통해 더 나은 위치에 서기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너무 냉혹한가? 나는 다른 관계들보다 더 냉정한 논리가 작용하는 게 바로 연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채무자가 아니라 채권자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더 좋아해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항상 상대보다 덜 좋아하는 척 밀당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나 자신을 갑으로 만들어 내 몫을 챙겨야 하는 걸까? 그런 인생은 너무 허망하고 고달프지 않을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내가 바라는 연인 관계가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널린 수많은 채권자들이 아닌 사람. 내가 더 좋아해 줄 때 더 많은 이자를 요구하는 게 아닌, 자기 스스로를 채무자로 만들어주는 사람. 그래서 양쪽 모두가 채무자가 되어, 서로에게 진심과 헌신을 다하는 관계로 만들어주는 사람. 그렇게 서로를 향한 애정의 형태를 무조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의 A컷과 B급 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