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무 살에도 필요했었다 ‘방황’
2011년 6월
임용에 세 번 떨어지고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몽골에 갔다.
별이 발아래로 쏟아진다는 고비사막으로
합격하고
방학하면 가야지 하고 미뤄뒀던 것이 수년이 지났다
그 놈의 합격학면, 합격하면, 합격하면,,,
문득,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비사막 투어는 6명이 한 팀이 돼서 가야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팀을 만들어 줬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3년째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는 미국남자,
중국에서 영어 강사를 하며 돈을 모아 이제 세계여행을 시작했다는 영국남자,
1년 세계여행으로 신혼여행 중이라는 스페인 커플.
대기업에 다니며 여름휴가를 모아 9일씩 여행을 한다는 한국 언니.
나도 늘 상상했었다.
내 키만 한 배낭을 메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상상
하지만 상상뿐이었다.
사범대에 입학하면서부터 내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빨리 졸업해서 빨리 임용에 합격하고 빨리 교사가 되어야 했다.
아니 되고 싶었다.
진로에 대한 방황이나 내 삶에 대한 고찰 같은 것은 할 겨를도, 할 필요도 없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하게
우리 부모님이 어디 가서 자랑할만하게
그래야 돋보이는 인생이 된다고 생각했다.
일주일을 함께 여행했다.
24시간 함께 있으니 모두가 친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세계여행 중인 외국인 네 명과
대기업에 다니며 밤낮없이 일하는 한국 직장인 한 명,
교사가 되려고 몇 년을 공부만 하는 한국 임고생 한 명,
외국인들이 보기엔 우리가 참 불쌍해 보였던 것 같다.
왜 한국 회사는 휴가를 일주일밖에 안주냐고,
한국에서는 교사가 그렇게 되기 어려운 직업이냐는 질문을 했었다.
나에게 베이비가 공부만 하는 게 안쓰럽다고 했었다
(그때 나는 스물다섯이었고, 다들 베이비라고 불렀었다)
그때도 나는 빨리 합격해서 방학 때 여행을 다녀야지
그 생각뿐이었다
교사가 되지 않고 여행을 할 생각은 감히 해 본 적도 없다.
결국 나는
불합격했다.
내 20대를 임용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렸지만
결국
나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번 발리여행에서 배낭여행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특히, 길리는 배낭여행을 하는 젊은이들이 참 많았다.
잊고 살았었는데,
배낭을 보니 여전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대학생 때, 방학 때마다 여행책을 쌓아 놓고 보던 내가 떠올랐다.
책으로 전 세계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우유니 소금사막도, 파키스탄 훈자마을도, 칠레 이스타 섬도
나는 왜 배낭여행을 해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동경하던 일이었는데,
왜 가방을 메고 무작정 훌쩍 떠나보는 용기는 없었던 걸까?
왜 그토록 나를 가두고 통제하며 살았을까?
임용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편안하게, 종종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때는 임용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인생은 망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선택지 같은 건 나한테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배낭여행에 대한 로망은 없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잠시 잊고 살았었던 것뿐이었나 보다.
졸업한 지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그때 사범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내 진로가 그렇게 정해져버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다르게 살고 있었을까?
적어도 배낭여행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사실 열아홉은 진로를 결정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내 이십 대가 참 아쉽고 아깝다.
그래서 나는 내 아들은 방황하는 스무 살이었으면 좋겠다.
뭘 해 먹고살지 앞길이 깜깜한 스물다섯이었으면 좋겠다.
무릎이 꺾이도록 좌절하고 가슴이 쓰리도록 실패하며 닥치는 대로 살아보기도 했으면 좋겠다.
너무 신중하거나, 너무 무거운 결정을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반드시 ‘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반드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깃털처럼 가볍게,
바람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