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 Sujin Aug 09. 2024

서아 # 15 진밥, 고두밥?

 여름휴가도 없이 일한 남편이 모처럼 쉬는 날이라, 아침부터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해주기로 마음먹고 쌀부터 씻어 안치다 피식 웃음이 난다.

 신혼 때, 둘이 한 식탁에 앉아 먹는 집밥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지라 일주일 식단까지 짜가며 열심히 밥을 했더랬다. 결혼한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때였을까. 아직은 한참 서툰 새댁이라 밥물을 잘못 맞춰 밥이 아주 질게 되었다. 에궁, 짐짓 속상한 마음을 누르고 파르르 끓는 김치찌개랑 이것저것 반찬 몇 개를 아무렇지 않게 내어놓았다.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이 고마워서 '여보, 밥이 오늘은 좀 질다, 그치? 그래도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말을 했더니, 웬걸 반응이 아주 의외다. '아니, 난 자기가 한 밥 중에 오늘 밥이 최고로 좋은데!'

 2년을 넘게 연애하면서도 몰랐다. 이 사람이 진밥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 순한 사람은 두어 달을 고두밥을 먹으면서도 본인은 진밥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것이 우리가 행복을 지키는 방법인 줄 알았다. 둘 중 한 명이 상대를 위해 기꺼이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난 그 후로도 여전히 내 취향에 맞춰 거리낌 없이 고두밥을 고수했고, 아주 가끔 그가 굉장히 사랑스러울 때만 호의를 베풀듯 진밥을 하곤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아주 핫한 요리연구가가 tv에서 남편이랑 밥 취향이 다르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면서 밥을 안칠 때, 밥솥을 살짝 기울여 쌀의 높이를 달리하면 한쪽은 고두밥, 또 다른 한쪽은 진밥이 된다는 솔루션을 알려줬을 때 얼마나 감탄을 했었던지.

 평화와 행복은 결코 한 사람의 절대적인 이해나 희생을 담보해선 안된다. 그건 잔인한 폭력이다. 남편의 콩깍지가 벗겨지기 전에 진밥과 고두밥의 솔루션을 얻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랑이란 이유로, 행복을 이유로 상대 혹은 내 자신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관계는 절대 정상적일 수 없다. 상대 혹은 내 마음에 드는 상처와 멍을 절대 간과하지 말라.

 의외로 방법은 간단할 수 있다. 평생 나에게 번민을 가져다줄 뻔했던 '진밥 or 고두밥'의 난제는 밥솥을 살짝 기울이는 걸로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았는가. 문제는 해결하려는 의지이다. 구성원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반쪽짜리 행복 말고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한 번만 더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기를 기도한다.

그럼에도 현실은 여전히 잘 참고, 많은 걸 이해해 주는 남편이 고맙다. 오늘은 특별히 쌀의 높낮이를 더 차이 나게 밥솥을 기울여 본다.

작가의 이전글 서아 # 14 아침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