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두 번째로 큰 도시 브르노에서 1년간 공부했다. 희망했던 미술사학과 학생으로 들어갔는데, 미술사는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지식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체코어로 수업을 들어도 괜찮을 줄 알았다.
웬걸, 체코어로 듣는 미술사는 정말 어려웠다. 그래도 다른 학과에 들어갔어도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미술사는 그나마 배경지식이 있으니 망정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용어가 내가 배웠던 생활 체코어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범유럽적인 용어들, 예를 들어 surrealism초현실주의, baroque바로크, rococo로코코 등의 미술 사조는 통일되어 있어서 적어도 어떤 주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체코어로 진행되는 수업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있나 알아보았다. 영국 근현대사와 미국의 역사가 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나라니까 한 번 들어 봐야겠다 생각하고 신청했다.
그리고 수업을 듣고 나서는 수업을 듣기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은 세계 곳곳에 끔찍한 짓을 했다. 제국주의 파트의 수업을 듣고 나니 혐오감이 밀려왔다. 현대에 우연히 영국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영국 국가의 이름 아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학살, 식민지배, 원주민 탄압이 있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갈등 파트의 수업을 들으면서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전쟁으로 인해 양 쪽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원주민이 너무 많이 죽었다. 문화도 언어도 잃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실려와 남부 목장에서 노동한 흑인 노예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식민지였던 나라의 후손이기 때문에 역사를 배우면서 피지배 민족의 설움을 안다. 우리는 탄압받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번성하고 행복해지고, 탄압하던 사람들은 불행해지는 스토리를 원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재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세계 공용어가 영어라는 것부터 꼽을 수 있다. 태어나고 보니 내 모국어가 세계공용어라면 얼마나 짜릿할까?
이 주제에 대해서 나는 체코에서 생활하면서 깊이 생각했다. 누가 잘못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 때는 옳았고, 지금을 틀렸다. 그 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 어느 부분에서든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시대마다 상식이 다르다. 제국주의 시대 당시에 소위 문명인이라 칭했던 영국인은 백인이 우월한 것은 상식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인종이나 아이큐의 높고 낮음에는 차이가 없으며, 문화의 차이는 기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가장 큰 예시다.
여기서부터 재밌는 이야기를 해 보겠다. 영국이 식민지에 끔찍한 짓을 했고 피지배 민족에 대해 공감하기 때문에 내가 영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영국인을 싫어하는 것일까? 아니면 영국이라는 브랜드를 싫어하게 된 것일까?
내가 브랜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당연하게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소속감을 느낀다.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메달을 따면 자랑스럽다. 그러나 결국 국가라는 것은 이념이다. 우리가 하나라고 '믿는' 혹은 '상상하는' 것이다. 나라는 한국인은 한국이라는 브랜드에서 만든 콘텐츠 한 개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지구인이기 때문에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다 - 라는 논리로 내가 여권 없이 유럽에 방문한다면 불법체류자가 되고 추방당할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국가에 구속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념이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지배한다. 세상은 국가라는 이념으로 돌아간다.
국가란 뭘까. 나는 한국이라는 국가를 알까. 이 이야기는 다음 화로 이어진다. 워낙 오랜 기간 이어진 생각이라 풀어내니 양이 많다. 내가 말한 것과 관련하여 여러분의 의견이 있다면 가감 없이 댓글로 말 걸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