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오래도록 달콤하게 기억하고 싶다
드디어 맛본다. 며칠 동안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병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들이 포르투갈 출장에서 돌아오면서 독특한 술이라며 사 왔다. 요즘엔 원화환율이 높아 국내보다 현지 가격이 비싸다는데, 그럼에도 굳이 먼 곳에서 사 왔으니 병 안에는 술만이 아니라 아들의 마음도 담겨있는 셈이다. 가족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비록 며칠에 지나지 않지만, 술맛에 대한 기대와 아들의 마음이 병 안에서 술처럼 익어갈 거라 여기며 참았다.
기다리는 동안, 이 술에 대해 알아보았다. 포트와인(port wine)이었다. 포르투갈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 와인으로, 발효 초기에 증류주인 브랜디를 첨가한 주정강화술이다. 발효 중에 독한 브랜디를 넣으면 알코올 도수가 높아져 효모의 활동이 멈추고, 발효가 중단된다. 그 결과 포도의 당분이 알코올로 모두 분해되지 않고 일부 남아 일반 와인보다 달콤한 맛을 낸다. 또한 높은 도수 때문에 산화나 부패가 억제되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
영국은 기후가 포도 재배에 적합하지 않아 프랑스 와인을 주로 수입했다. 그런데 프랑스와 전쟁과 관세 문제로 수입선을 포르투갈로 바꾸었으나 다른 문제가 생겼다. 포르투갈에서 영국까지 먼 해상길을 오가는 동안 와인이 변질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브랜디를 첨가했다. 이런 방식이 오히려 독특한 풍미를 가진 포트와인이 되었고 지금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전통술로 자리 잡았단다. 알코올 도수가 20도 안팎이라니 소주와 비슷하고, 달콤한 맛이라니 집에서 소주와 포도를 섞어 담근 포도주가 떠올랐다. 그 맛이 얼마나 다를지 아니면 얼마나 닮았을지 궁금해졌다.
포트와인처럼 발효과정에서 독한 술을 첨가해 빚는 술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과하주(過夏酒)다. 이름 그대로 ‘여름을 나는 술’이라는 뜻이다. 더운 여름에도 쉽게 상하지 않는 술이라 풀이되기도 하고, 마시면 여름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는 술이라는 의미도 담겼다고 전해진다. 과하주는 1670년에 쓰인 조선시대 요리책 「음식디미방」에 제조법이 기록된 전통술이다. 누룩과 찹쌀밥을 물에 섞어 사흘 정도 두었다가 여기에 증류 소주를 넣고 칠일쯤 지나면 마실 수 있으며, 맛은 독하고 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맛과 도수의 조화가 포트와인과 닮았다. 제조법도,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는 특성까지도 놀랍게 비슷하다. 시대와 지역은 달라도 술을 빚고 즐기는 사람들의 지혜는 같다.
과하주는 작년 여름에 대형마트에서 시음하는 ‘백0주 과하’를 마시며 처음으로 맛보고 두 병이나 사서 두고두고 마셨다. 맛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으나, 높은 도수보다 입안에 오래 남던 깊고 부드러운 향만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래서 올해도 출시되었나 마트에 갈 때마다 여름 내내 주류 판매대를 기웃거렸으나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백0주는 오래전 한때 소주와 맥주 다음으로 인기 있었고, 소주와 반반 섞어 ‘오십세주’라고 부르며 즐겨 마셨던 술이다. 사실 오십세주는 그보다 앞서 유행했던 양주와 소주를 섞은 폭탄주를 뒤이은 술이었고, 점차 약한 술을 선호하게 되면서 지금의 소맥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생각해 보면, 오십세주는 소주를 더해 도수를 높인 일종의 주정강화술이었다. 작년에 맛본 '백0주 과하'의 탄생에도 어쩌면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제조사의 정확한 기획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술 한 잔에도 시대의 취향이 스며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댁에 먼저 들렀던 큰딸이 오면서 가족이 모두 모였다. 오랜만에 식탁에는 웃음이 돌고, 일상과 여행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들은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에서 아빠 또래의 한국 여행객을 많이 봤다며 엄마랑 꼭 다녀오라는 말로 여행담을 대신했다. 나는 기다렸던 포트와인을 따르며 이 술의 내력에 대해 짧게 말하며 건배했다.
다들 “오~ 좋은데”라며 한 목소리로 처음 보는 술맛을 평했다. 한 모금 머금자, 알코올의 독한 기운은 30년 동안 오크통에서 순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코냑에서 느꼈던 브랜디의 강한 풍미는 살아 있었다. 거기에 더해 부드러운 단맛과 향긋한 여운이 번지며 입안에 머물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콜레스테롤과 혈압이 적정 수치 이상으로 점점 올라 그동안 즐기던 막걸리 반주를 줄여왔다. 하지만 이번 긴 연휴만큼은 저녁마다 자식들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즐겼다. 술 때문에 건강을 해친다 해도 좋을 만큼 기쁘고 즐겁게 마셨다. 포트와인은 일부러 조금 남겨두었다. 혼자 오늘을 기억하며 맛보려 한다. 달콤하고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