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양현 이야기로 거닐다 1
언양의 유래
이병길(지역사 연구가)
언양에 와서 산지 10여 년이 지났다. 살다 보면 정이 들겠지만 나는 언양에 오자마자 좋았다. 남쪽에는 마르지 않는 남천이 있었고, 서북쪽에는 야트막한 동산보다 조금은 높은 화장산이, 남쪽에는 옛날 봉수대가 있었던 봉화산이 있다.
마을 걷다가 옛 언양읍성 길을 걸으면 무엇보다 건물이 높지 않아 하늘을 많이 볼 수 있다. 집 주변에는 산들이 연이어 달음질해서 좋았다. 남들은 영남알프스라고 하지만 나는 영남산무리라고 부른다. 산들이 무리 지어 언양을 감싸고 있다. 서북쪽에는 제일 높은 고헌산에서 쌀바위가 있는 서쪽의 가지산을 휘돌아 방향을 바꾸어 서남으로 배내봉을 지나면 달 보기 좋은 간월산이 있다. 간월재에서 눈을 잠시 멈추다가 다시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신불산이 그리고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 더 넘어 양산의 오룡산으로까지 산은 낙동정맥을 이어간다. 다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쌍둥이 산처첨 문수산과 남암산이 있고 그 남동쪽에는 아스라이 운무에 감춘듯한 산수화 같은 솥밭산과 천성산이 펼쳐져 있다.
언양은 교통의 요지이다. 울산 ktx역이 있고 경부고속도로 나들목이 있다. 동쪽으로는 울산, 남쪽으로는 양산과 부산, 서쪽으로는 밀양과 청도, 북쪽으로는 경주와 연결되어 사방으로 길이 뻗어있다. 그래서 주변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 산야초들이 언양시장에 모여들어 남천강변까지 시장이 펼쳐진다. 2일과 7일에 장이 열린다.
그런데 언양(彦陽)은 한자말로 보면, 선비와 햇볕의 마을이다.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작천정과 집청정이 있지만 실상 언양은 선비와는 거리가 있는 동네이다. 언양은 헌양(巘陽)에서 온 말이다. 고헌산 동쪽의 양달마을이란 뜻이다. 헌양이 발음의 변화로 언양이 된 것이다.
예전의 언양은 지금과 다른 곳에 있었다. 언양지역에는 진한 12국 중 하나인 기저국(己柢國)이 있었는 데, 신라시대에 이곳을 거지벌촌(居知伐村)에 속했으며 거지화현(居知火縣)이라고 불렀다. 예스럽게 읽으면 ‘거치불’로 거치라는 족장(군장)이 다스리던 나라였다. 신라가 현(縣)을 설치할 때 족장의 칭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현재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지화마을이 중심지였다. 지화마을 주변은 예전부터 1만 채의 집을 먹여 살릴 농경지가 있어 ‘만당들’이라 하였다. 지금도 지도상으로 보면 상북면 천전리에서 석남사의 궁근정리까지 농경지가 남천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중국식 행정명칭으로 바뀌면서 거지화현은 헌양현(巘陽縣)이 되었다. 그때는 양산을 포함하는 양주(良州)의 수령이 있는 영현(領縣)이 되었고 이때에 지금의 언양지역으로 현치(縣治)를 옮겼다. 경주의 남산부인 현재의 두동면과 두서면은 경주에 속했다.
고려시대 헌양현의 치소(治所), 즉 중심지역은 상북면 천전리로 추정된다. 지난 2010년 한국문물연구원의 상북면 천전리 유적 발굴조사에서는 고려시대 건물지 10동과 담장, 보도시설과 삼국시대 수혈 4기 등이 확인됐다. 출토유물은 기와류, 청자류, 토·도기류 등으로, ‘객사(客舍)’명문 기와를 비롯한 10세기 말부터 12세기 무렵에 사용된 고려시대 객사 유구(遺構)가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기와는 주로 궁궐과 사찰, 관청 건물 등에 사용되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의 고려 견문록인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는 기와집을 세운 경우도 있지만 열에 한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기와는 한정된 건축부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을 고려시대 헌양현의 객사와 관아가 있었던 치소(治所)로 볼 수 있다.
발굴에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유물들도 출토되어 이 지역이 조선시대까지 건물이 있었으며 의미있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은 천전마을회관 맞은 편 북쪽 도로[현재 봉화로]이다. 이 마을에 신라시대 고찰인 용화사가 있고, 남쪽에는 천전리 산성[과부성]이 있다.
고려시대 울주(蔚州)는 1018년(현종 9) 방어사가 설치더ㅣ고 주현(州縣)이 되고 헌양현과 동래현, 기장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고려 후기 1143년(인종 21) 헌양현(巘陽縣)은 감무(監務)가 파견되면서 울주에서 분리되었다. 이때 주현(州縣)으로 승격되면서 언양현(彦陽縣)으로 개칭한 듯하다. 이후 서부 울산지역은 헌양현(언양현)으로, 울주[울산]와는 다른 고을로 존속했다. 이러한 행정구역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헌양은 언양이라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현감(縣監)을 두어 다스렸다, 언양은 김씨와 박씨 성이 많았다. 이들로 구성된 향리들이 언양의 자치를 담당했으리라.
『세종실록지리지』 언양현에, 언양의 고을의 풍속은 검소하고(土俗儉嗇), 토질은 비옥하고 기후는 따뜻하다( 厥土肥 風氣暖)고 하였다. 또 『경상도읍지』(1832)에 따르면, 언양 고을의 풍속은 검소하며, 의복은 흰 색을 좋아하며 음식은 간소하다. 8월 15일 남천의 남북쪽 사람이 읍성에 모여 마두전(馬頭戰, 줄당기기)을 하였다. 또 겨울참외가 성 북쪽에 났는데, 종자는 임금의 경작 밭인 경적전에서 가져와서 적전고라 했다. 매년 겨울에 심어 4월 그믐 전에 바쳤다. 그 심고 기르기가 매우 어려워 성종떼 부역이 혁파되었다. 언양의 겨울참외 맛이 어떠했을까, 군침이 돈다.
헌양은 지금의 언양읍, 상북면, 삼남읍, 삼동면, 두동면, 두서면 지역으로 이루어졌다. 고헌산 아래 양달마을인 헌양은 오늘날 주변의 6개 읍면지역을 포함하여 언양의 문화와 역사를 같이 공유하며 성장하고 있는 지역이다. 최근 이 지역을 서울주로 부르고 있지만 여전히 언양은 헌양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