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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길 Sep 07. 2023

2. 언양읍성을 한바퀴 돌아볼까-언양읍성의 역사(2)

2. 언양읍성을 한바퀴 돌아볼까-언양읍성의 역사(2)     


- 이병길(지역사 연구가)


〇 성쌓기 공사는 어떻게 했을까?     


언양읍성은 토성에서 성석으로 중축 확장하는데, 약 50년이 걸렸다. 매년 공사를 했다면 33.7척 정도의 공사였다. 진짜 이렇게 조금씩 성을 쌓았을까?     


현재 언양읍성의 석성 개축 확장공사 기간과 동원 인력에 대한 기록은 없다. 성 쌓기 부역(城役)은 농번기를 피해 농한기에 했을 것이고, 동원된 인력은 양산, 언양, 경주, 울산, 기장의 평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급하게 쌓다보면 부실공사가 될 수 있다.


1416년 울산군성의 부실공사로 인한 문책 인사가 있었다. 태종 16년(1416) 10월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봉화 현감(奉化縣監)·언양현감(彦陽縣監)·수군 만호(水軍萬戶)등과 더불어 울산군성(蔚山郡城)을 감독하여 쌓았는데, 두어 달이 못 되어 무너졌다. 당시 총책임자였던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이사청(李士淸) 등의 임명장[職牒]을 거두어 문책을 하였다. 당시 울산군성을 쌓는데 울산군, 봉화현, 언양현 사람과 수군이 동원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공사는 쌓은지 두달만에 허물어질 정도로 부실공사였던 모양이다. 이는 급하게 짧은 기간에 성쌓기를 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당시 성은 비에 취약했다. 그나마 산성은 돌을 차곡차곡 쌓았기 때문에 무너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현재 언양읍성 동쪽 부분의 복원이 협축식(挾築式) 성의 모습이다. 하지만 토성이면 쉽게 빗물에 쉽게 허물어졌다.      

발굴중인 언양읍성, 영화초등학교 자리(2023년)
발굴 중인 언양읍성(2023년)

1476년(성종 7) 5월에 울산읍성을 쌓을 때 다음과 같이 하였다. 울산(蔚山)은 좌도 병마 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의 영성(營城, 병영성)과 멀지 않기 때문에 난리[事變]가 있더라도 문득 쉽게 들어갈 수가 있으므로 처음에 울산읍성을 쌓지 않았었다. “그러나 연변(沿邊, 강변)의 큰 고을에 성보(城堡, 적을 막기위한 임시 작은 성)가 없는 것은 불편[未便]하니, 금년의 가을이 끝날 때부터 본관(本官)의 군인(軍人)을 소집[抄出]하여 각각 해당 고을의 수령으로 건축 감독[監築]하게 하되, 굳이 일시(一時)에 다 쌓을 필요는 없습니다. 금년에 몇 자[尺]를 쌓고 다음해에도 몇 자를 쌓아 점차로 쌓아나가면서 해마다 쌓은 척수(尺數)를 아뢰게 하는 한편, 만일 흉년을 만나게 되면 그 사실을 아뢰어 역사(役使)를 중단시키며, 감역(監役)을 게을리한 수령(守令)이나 관찰사(觀察使)·절도사(節度使)를 죄를 엄중하게 논[重論]하게 하소서.” 이에 병조에서는 천천히 성을 쌓아도 된다고 결정하였다. 이를 보면 가을 추수가 끝난 뒤 농한기에 성을 쌓되 일시에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여유를 두고 여러 해에 걸쳐 공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1477년(성종 8) 성쌓기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즉 연변(沿邊)의 성보(城堡)는 진실로 마땅히 빨리 쌓아야 하고, 내지(內地)의 성보 또한 불가불 쌓아야 하며, 또 그중에서 왜인(倭人)이 경유하는 낙동강(洛東江)변의 읍성(邑城)은 더욱 마땅히 급히 쌓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논의의 결과 성쌓기 1순위는 연변, 2순위는 내지, 3순위는 낙동강변으로 정리되었다. 당시 양산(梁山)·언양(彦陽)등의 고을은 비록 내지(內地)라 하더라도 혹은 변방(邊方)에 가깝고, 혹은 왜객(倭客)이 경유하는 길이므로, 성보(城堡)가 없는 것은 불가하니, 마땅히 급히 쌓아야 할 지역으로 손꼽았다.      

언양읍성 북쪽성 발굴 단면

대부분 성을 쌓는 것은 다만 그 고을의 공사에 동원될 사람인 군정(軍丁)만 사용하기 때문에 1년에 쌓는 것이 50여 척(尺)에 불과하니, 이것으로 계산하면 거의 50년에 이른 뒤에야 쌓기를 마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즉 농사를 쉬는 시기[農閑期]에 점차 수리 증축[修築]하게 하고, 매 연말[歲季]마다 그해에 쌓은 척수(尺數)를 아뢰게 하였다. 그 본 고을의 사람들로 하여금 풍년을 기다려 농한기를 타서 완전히 수축(修築)하게 하여 뜻밖의 일[不虞]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했다. 성쌓기는 계획된 일이나, 일이 많고 혹은 흉년으로 인하여 거행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문종 임금 당시 국가에 일이 없고, 여러 지방[諸道]이 풍년이니, 먼저 연변(沿邊)의 성보(城堡)를 쌓고, 점차 내지(內地)에 이르는 것이 편하겠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성쌓기는 풍년해의 농한기에, 강변 큰 읍성부터 하였고, 동원된 인력은 그 지역 형편에 따라 동원되었다. 즉 매년 농사의 형편[年事]의 풍년과 흉년[豐凶]을 보아서 매년 농한기를에 각각 근처에 사는 백성들로 쌓게 하되, 큰강변[沿邊]부터 시작하여 올해에 한 성을 쌓고 다음해에 한 성을 쌓아 점차로 쌓게 하였다. 그리고 큰 고을은 그 고을로 하여금 스스로 쌓게 하고, 작은 고을은 이웃 고을과 같이 힘을 합하여 쌓게 하였다. 그리하여 1477년(성종 8) 가을부터 성 쌓기가 시작[始築]되었다. 그해 가을에 마침내 울산(蔚山)의 읍성(邑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15척(尺)이고 둘레가 3천 6백 39척이었다. 현재 측정 결과 둘레는 1.7㎞ 정도로, 포백척(布帛尺)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읍성 성쌓기는 예상과 달리 몇 달 사이에 이루어졌으니 백성의 고초는 심각했다.      


울산에서 경상좌병영 병마평사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은 울산읍성쌓기 소식을 듣고 <축성행(築城行)> 시를 지었다.     


“쭉쟁이 가을 벼는 도리깨질 할 것도 없는데/ 타작마당 치우기도 전에 부역을 독촉하네./ 바닷가 두 고을에 부역을 동원하여/ 여덟 경(頃) 한 장정 뽑으니 삼대처럼 많았네./ 동쪽 서쪽에서 소리 지르는 촌장 이정들/ 깐깐한 윗사람들이 두렵기만 하다네./ 부탁하노니, 택문의 노래는 부르지 마시게/ 삼포 오랑캐가 가스 속 걱정거리라네."

      

언양읍성의 석성 증축도 풍년이 든 해의 농번기를 택하였고, 동원된 인력은 언양사람을 중심으로 하되 이웃 경주, 울산, 양산, 기장, 밀양사람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언양읍성 공사는 50년이 걸렸을 것이다. 매년 농한기에 성쌓기에 동원된다면 지역민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지방재정도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성쌓기는 결코 쉬운 사업이 아니었다.   

   

복원된 언양읍성 북쪽 성벽

태종 10년(1410) 기록에서 성쌓기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평양 “성(城)을 쌓는 군정(軍丁)들이 돌을 3, 4일이나 되는 거리[路程]에서 가져오므로 소나 말[牛馬]이 피곤하고 부녀가 돌을 운반하기까지 하여 길에 왕래가 끊이지 않고[連絡不絶], 민간(民間)의 농기구[農器]는 모두 쇠망치나 끌[椎釘]이 되어 그 폐단을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세종 때 이보흠의 상소에 보면 “성을 쌓는 땅과 돌을 운반하는 곳이 멀면 거의 30리, 가까우면 10여 리가 되어 백성 수십 명을 사역시키어도 하루에 운반하는 것이 한두 개의 돌에 불과할 뿐이었다. 돌성[石城] 1척(尺)을 쌓는데 사람을 6, 7명까지 써도 1, 2년에 축조를 끝내는 일이 없었다.”     


현재 상북면 거리 하동마을 앞에 조그마한 야산(野山)이 하나 있다. 그 면적은 1정보(一町步) 정도의 임야이다. 마을의 산이라고 하여 동뫼산, 홀로 있다고 독뫼산, 밀양에서 왔다고 밀양산이라고도 한다. 마을 전설에 의하면 ‘밀양(密陽)에서 온 산’이라고 한다. 옛날 언양현에 성을 쌓는데 돌과 흙이 필요한데, 밀양의 어떤 노후(老朽, 노파)가 신묘한 도술[神道]를 이용해서 밀양에 있던 산을 여기까지 몰고 왔다. 그런데 마침 거리마을에 당도하니까, 언양성(彦陽城)의 사역(使役)이 마쳐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여 그가 그만 버라고 간 것이 하나 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훗날 밀양에서 임야세(林野稅)를 받으러 다녔다고 마을에 전해오고 있다. 또 훗날 정심(鄭諶)은 이곳에 묘소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밀양부사에게 산세(山稅)를 내고 매장 허가증을 받았다고 한다.      


독뫼산 전설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언양현의 성쌓기에 밀양사람이 동원되고, 밀양의 흙과 돌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성쌓기가 결코 간단한 공사가 아니었다. 아무튼 언양읍성이 토성을 석성으로 쌓아 완성된 것은 1500년이다. 공사 기간과 동원 인력, 소요 흙과 돌에 대한 자료는 현재 없다. 무엇보다 강제로 동원도 지역민에 의한 성쌓기는 계획된 전문가에 의한 시공(施工)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재정적으로도 충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비전문가에 의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언양읍성을 증축되었다. 단지 성곽의 확장만이 아니라 읍성의 관공서인 동헌과 객사 등도 증개축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세종시대의 이보흠의 상소에 의거하여 성을 쌓았다. 이보흠은 “ 내면에 돌을 메워 반드시 넓이를 16척이나 하여, 백성의 힘을 거듭 곤하게 한 뒤에야 성을 견고하게 함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외면의 6, 7척은 오로지 큰 돌을 써서 쌓고, 내면의 7, 8척은 섞어서 흙으로 단단하게 쌓되, 다 쌓은 뒤에는 흙 2척을 덮게 하고 그 위에 떼를 입히되, 안으로 향해 경사하게 하여 물이 쉽게 빠지게 하기를 도성(都城)의 제도와 같이 하면, 사람이 오르고 내리기에 편리하여 적을 제어하는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을 쌓을 때를 당하여서는 호지(濠池)의 흙을 파서 성의 내면을 메우면서 쌓으면 반드시 다시 참호(塹濠)를 파는 데에 백성의 힘을 쓰지 않아도 성이 이루어질 때쯤 되면, 호지도 또한 깊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전일에 한 성을 쌓는 공력을 가지고 두세 성을 쌓을 수가 있으니,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대저 비가 흙에 들어가는 것이 한두 자[尺]에 불과하니, 돌성 위에 흙 2, 3척을 쌓아서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비록 백년을 지나더라도 반드시 무너지게 될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상소하였다.         

복원된 언양읍성 남문 영화루 주변, 내벽은 토성의 흙성쌓기 형식이다.

현재 언양읍성 발굴 자료를 토대로 보면 이보흠식 성쌓기가 적용되었다. 언양읍성과 같이 평지에 쌓은 석성인 경우에 거대한 바위를 면(面)만 거칠게 다듬은 기초 돌[基石] 위에 큰 돌을 얹었다. 외벽인 큰 돌도 사각형으로 다듬은 가공된 돌이 아니라 자연석이나 쪼갠돌[割石]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결국 성벽은 일정하게 조직적인 모양으로 쌓는 바른층쌓기(Ashlar Masonry)방식이 아니라. 허튼층쌓기(Rubble Masonry) 또는 막쌓기(Random Masonry) 방식이었다. 그만큼 정교하지도 견고하지는 않았다. 자연적이고 거친 돌 사이에는 틈이 생길 수 밖에 없어 큰 돌 사이에는 많은 잔돌을 끼어 쌓아 올렸다. 성벽이 올라갈수록 돌의 크기는 작아졌다. 이런 성쌓기는 유지보수에 어려움이 많았다.      


성벽을 쌓은 다음 부분에는 자연석이나 잡석을 막 채워 쌓았다[뒤채움]. 이 돌 역시 다듬은 것이 아니라 자연석을 채워넣어 조직적으로 견고성이 부족했다. 이때 잡석과 함께 흙을 섞는 경우도 있었다. 만약 모래와 흙으로 빈 공간을 채웠다면 빗물에 붕괴가 쉬운 구조였다. 이는 단기간 축성을 완료하기 위해, 또는 부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언양읍성의 북쪽성벽은 뒤채움 구조에서 하단부의 채움석은 석재 사이에 흙을 다져놓았다. 중단부의 채움석은 방향이 제각각이었고 석재사이에 틈이 있어 채워넣은 느낌이었다. 이는 부실한 공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상단부는 흙을 덮어서 마무리 하였다.    


마지막 내벽은 경사지게 흙으로 쌓았다. 얼마큼의 흙을 두껍게 쌓는가에 따라 비에 의한 붕괴를 막을 수 있아ᅠ갔다. 만약 돌성 위에 흙을 2, 3척을 쌓아서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비록 백년을 지나더라도 반드시 무너지게 될 근심은 없을 것이다. 이런 성쌓기를 내탁식(內托式) 축조법이라 한다. 즉 수직에 가까운 외벽, 잡석으로 쌓은 뒤채움부, 경사지에 다져놓은 토사층 이렇게 3가지 형태가 결합된 것이 평지에 건축한 읍성 성벽구조였다. 경사지 부분은 계단식으로 돌을 쌓고 난 뒤에 흙을 메우기도 했다. 조선의 평지성은 돌과 흙의 조합이었기에 빗물에 취약했다. 아무튼 최상층 부문에 떼를 잘 입혀 경사지게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돌틈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최대한 막는 구조였다. 현재 언양읍성 북쪽성부분의 복원은 토성과 석성이 결합한 모습으로 부분적으로 복원되어있다.      


언양읍성 남문지(영화루) 발굴 조사 결과, 체성의 폭은 옹성과 같거나 약간 좁은 550~600cm이다. 옹성은 남문 앞에 설치된 반원형의 성으로 체성과 맞물려서 동시에 축조되었다. 외벽은 현재 1~6단 정도가 잔존하고 있으며 최대높이 280cm, 폭 600cm이다. 축조방식은 성벽의 내부와 외부 모두 돌로 쌓는 협축식(挾築式)으로 지표면을 60cm 정도 굴착하여 사람머리크기[人頭大]의 강돌[川石]으로 채워 지정한 후, 상단은 편평한 할석을 놓았다. 그 위에 60cm 정도 안으로 들여 20cm 정도 두께의 편평한 지대석을 올렸으며 다시 30cm 정도 들여서 기단석과 면석을 쌓았다. 그리고 내벽과 외벽 사이의 채움돌은 주로 할석을 이용하였다. 해자는 체성 외벽에서 9~9.6m, 옹성 외벽에서 4~6.5m 떨어져 체성과 옹성을 따라 굴곡을 지으며 조성되었다. 해자의 규모는 폭 3.5~5m, 현존 깊이 90cm였다.    

복원되지 않는 언양읍성 서쪽성 부분

현재 언양읍성의 성 기단부들이 잘 보존되어 일부 부분 복원되었다. 기단부가 내려앉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연약지반은 아니었기에 성곽이 어느 정도 튼튼하게 유지되었고 빗물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흙의 두께와 떼가 있었다. 하지만 석성으로 축조된 지 벌써 800년이 넘었으니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비바람과 세월, 전쟁과 인간의 욕심으로 성이 부분적으로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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