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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Apr 01. 2024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는가.

아부지와 형은 자주 싸웠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한소리를 들을 것 같다 싶으면 빠르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최소한의 피해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경향은 내가 반항 없는 사춘기를 보내는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난 무슨 일이든 좋게좋게 생각하려 든다. 낙천적이라고 볼 수 있는 내 성격은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 덩어리와 같다. 말하자면 회피형 인간.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겠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것이다. 


중학교 때 반 친구가 내가 아끼는 배드민턴 채를 부러뜨린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고, 나는 너무 화가 났더랬다. 이 자식은 나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배드민턴 채를 험하게 다뤘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당시 착한 이미지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만만해 보일 법도 했다. 거기에다 당시의 나는 꽤나 꼬여있었으니 ‘나를 만만하게 봤어!’와 같이 열등감 어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녀석은 배상과 관련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그저 내게 미안하다고만 했다. 근데 뭐 중학생인데 뭐 어쩌겠나.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그 자식에게 “당장 물어내!!”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난 그럴 수 없었다. 나름 원만했던 교우관계를 아예 틀어버리고 싶진 않다는 명목이었다. 나는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말하고, 또 되내이며 내 마음을 속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면 일단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난 모든 일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개인적인 문제든, 사회 문제든 모두 그런 식으로 접근했다. 이성적으로 봤을 때, 무조건적으로 옳은 주장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를 명심한 채, 두 입장 모두가 일리가 있다는 황희 정승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이성적인 것, 합리적인 것, 고로 옳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고, 지금도 꽤나 그런 식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모두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내 미적지근한 태도는 단순히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것이 싫어서가 아닐까? ‘이성’이라는 개념을 입맛대로 해석하여 ‘허무주의’의 이유로 삼고, 가치판단을 언제나 보류함으로써 보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주제 이외의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그저 지독한 회색분자에 불과하지 않나? 내가 강박적으로 유지하고자 했던 중립적인 태도가 그저 마찰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었나? 정말로? 



내 생각을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걸까. 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을 만큼만 표현하며 산다. 내 자신이 나이스하게 비춰지길 바란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뚜렷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니, 쉬이 한 이념을 표방하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뚜렷한 이념을 가진 이들에게 경외심을 느낀다. 이념에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완벽한 이념이란 존재하지 않을텐데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에 모든 일을 대입하여 생각한다는 것이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모든 부침과 갈등이 합으로의 필연적인 변증법적 과정, 사고의 발전을 위한 과도기적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을 단순히 별종, 바보들이라 치부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반면 내가 가진 믿음이란 불가지를 향한 믿음뿐이다. 


미국의 사회 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라는 격언을 남긴 바 있다. 역사가 잘못 흘러가고 있을 때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그 잘못에 동조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무렴. 아무리 생각해봐도 맞는 말이다. 그래서 너무 열이 받는다. 그 어떤 선택도 내리기 어려운 사람에게 이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다. 입장을 정하거나 결정을 내리기에 세상의 문제란 너무도 복잡하고 불명확한데, 세상 자체가 이미 경향성을 띠고 있어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도 현행을 유지한다는 결정이 되어버려 본질적으로는 결정을 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부조리하지 않나. 소신이 없는 내 어설픈 선택의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일 자신도 없고. 억지로 소신을 가진다 한들, 그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신을 가진다 한들 그걸 드러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걸 드러내는 게 맞는걸까? 


소신은 갈등을 초래한다.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는 문제라면 적이 반이나 생기는 일이다. 그래서 소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 소신을 애초에 뚜렷하게 가지지 않는 것 역시 훌륭한 생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어딘가엔 치우친 사람이겠다. 저번 대선 때 투표도 했고. -몇 번 찍었는지는 비밀이지만- 판단을 보류하는 경향이 있다한들 결국엔 치우쳐져 있을 테다. 끝없이 보류만 한다면 그건 판단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러고 싶진 않다. 다만 확신을 가지진 못할 것 같다. 


오히려 난 내가 뚜렷한 신념이 없는 것이 오히려 나의 뚜렷한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지만 뛰어내릴 자신도, 뛰어내리는 사람을 보며 혀를 찰 생각도 없으니, 뛰어내리는 사람과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모두를 지켜보며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수밖에. 그러다 생각의 추가 기우는 시점이 오면, 달리는 열차의 꼬리 쪽으로 달려가기라도 할 테다. 


물론 판단이 섰다고 해서 그걸 모두에게 보이고 싶진 않다. 예컨데 연예인들이 돈이 없는 척 하는 것도 빈자들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임을 밝히면 뒤가 구릴 것이라 여기고, 빈자임을 밝히면 게으를 것이라 여긴다. 세상은 부자도, 빈자도, 사회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모두 경멸의 대상으로 여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최소한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소신을 가지는 것이, 입장을 밝히는 것이 갈등을 초래하지 않았더라면, 해가 되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더 쉽게 마음을 정하고, 밝히고 말았겠지. 


회색분자의 입장에서 모든 일은 결국 개인적인 행복에 집중된다. 이득이면 하고 아니면 하지 않는 것. 그냥 삶 전반적으로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액수와 취향에 맞는 행복한 경험을 하고, 그런 행복한 순간의 연속을 통해 행복한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 그러면서도 사회 전반적인 논쟁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 그렇게 감정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 여전히 난 이만한 삶이 없다고 보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만치 편한 삶은 없다고 본다. 다만 이게 옳은 삶인가, 하는 의문은 있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나를 책임지는 것도 버거운 이 현실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난 어제의 신념이 오늘의 치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갖가지 선명한 색깔을 화려하게 흩뿌리는 호전적인 사람들이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저 색들이 나중에는 모두 더럽게 섞여, 쓰지도 못할 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 마음속 회색은 빠지지 않을 것만 같다. 난 이제 미지근해져 버린 내 태도를 밝히는 것 또한 두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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