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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Mar 31. 2024

도덕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

도덕은 왜 있을까? 도덕이 왜 있는가를 생각해보기 전에 도덕의 뜻을 인터넷에 쳐보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라고 나온다. 잠깐만.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무언가?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게 대체 무얼까. 그런 건 당연하게도 없다. 세상엔 당연한 게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무언가’란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이 먼저 있고, 그 일을 남이 자신에게 행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내가 먼저 그 일을 하지 않는 걸 점잖게 적었을 뿐이라고. 생각해보면 인간의 역사 속에서 ‘도덕’이라는 개념보다는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이라는 개념이 먼저 있었을 테다. 인간 개개인에 있어서 인간이라는 존재론적인 자각보다는 지켜야 할 개인의 영달이 먼저니까. 그런 측면에서 도덕이 발생한 이유란 결코 인간이 착한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 라는 공자의 말은 그야말로 도덕의 골자를 담고 있다. (이처럼 동서고금과 종교, 철학을 막론하여 존재하는 ‘우리가 대우받기를 원하는 대로 대우해야 한다’는 식의 원칙을 ‘황금률’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사람이라면 무릇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그리고 공자 역시도 그런 이유로 말했겠지만 (*성선설), 앞서 말했듯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얼핏 보면 선의만을 담은 듯한 이 원칙, 즉 황금률이 발생한 실질적인 이유란 마음 속에 내재된 선이 아닌 역시 ‘내가 당하기 싫은 일’ (혹은 내가 당하고 싶은 일) 에 있다.


‘당하기 싫은 일’이 뭐가 있을까. 사귈 것 같았는데 상대가 사귀어주지 않는다거나, 될 것만 같았던 정직원 전환에 실패한다거나, 음식점 알바를 하는데 손님이 마감시감 끝까지 나가질 않아서 추가 수당도 없이 애매하게 일을 15분 정도 더 한다거나, 결혼을 했는데 축의금을 뷔페값도 안 나오게 받았다거나. 이와 같이 상도덕(*상인은 아니지만)에 어긋나는 일, 하지만 민형법 상으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런 상황들을 끊임없이 규격화하여 미리 인식함으로써 부조리의 발생에 의한 실망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한다. 심지어는 여론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부조리에 대한 억제력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데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자신의 연인이 바람을 피는 경험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괴짜 취급하는 건 친구가 무심코 사온 베스킨라빈스 파인트 안의 민트초코를 보고 실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겪게 되었을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이 없었음을, 상대방에게 귀책 사유가 있음을 증명받고자 한다. 자신이 겪은 일을 누군가에게 말했을 때 “응? 그렇게 지냈는데 왜 안 사귀는 거야?” “그렇게 안 뽑는 게 말이 돼? 내가 봤을 때 낙하산 있어” “꼭 마감시간 끝까지 쓰고 나가는 인간들 있어..” “축의금을 5만원 밖에 안 넣었다고? 미친 거 아냐?” “그래도 민트초코는 물어보고 퍼와야 되는 거 아니야?” 와 같은 위로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그런 점에서 도덕을 ‘사람으로서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 말하는 건 인간에 대한 너무도 긍정적인 관점이 아닌가 싶다. 결국 도덕이란 개개인이 자신이 기대하는 일에 부정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진 억제력 혹은 일종의 방어기제일 뿐인 것이다. (물론 방어기제는 나쁜 게 아니지만)


우리는 기대에 부정당한 사람을 위로할 때 강한 단어와 어조를 사용하곤 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부조리, 내 손으로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조리에 있어서는, 상대방의 도덕성을 의심하며 시원하게 욕해주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덕은 인간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서운함, 섭섭함에 대한 쿠션이 되어, 아쉬운 소리를 그나마 덜 볼품없게 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준다.  


따지고 보면 내게 실망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니 내 기대를 저버린 타인의 행동 역시 그 사람의 자유다. 내가 원하는 바를 강제할 순 없는 노릇이니, 그녀가 그렇게 나와 사귀지 않는 것도 자유고, 손님이 마감 시간을 꽉 채워서 쓰고 나가는 것도 모두 자유다. 자유란 대개 부조리를 발생시키므로 이번엔 내가 우연히 그를 감당할 때가 된 것 뿐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 오만과 기대가 날 힘들게 하는 것이고, 문제 삼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인 것이다. 그 사실을 곱씹고 있자면 친구가 아무리 도덕에 기반한 위로를 해줘도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차라리 마냥 미워할 수 있다면 속이라도 후련할까,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 그 누구의 잘못도 없는 일이고 내가 괜히 기대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싸게 먹힌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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