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가오슝(高雄)행 비행기 안.
비행기 좌석에 착석 후 눈을 감았다. 어제 남편으로부터 라인 연락을 받고 한숨도 못 잔지라 사실 너무 피곤했지만 또 잠은 안 왔다.
[LINE]
離婚しよう。
(이혼하자.)
もうあなたとは別れると決めたから。
(당신과 헤어지길로 결심했어.)
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본 엄마 얼굴이 떠올라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또 혼자 처량맞게 울고 싶지는 않은지라 흐르려는 눈물을 꾹꾹 참아내며 가오슝에 도착했다.
평일 오후에 도착한 비행기.
가오슝에 도착해서 대만 유심으로 갈아 끼우자 그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LINE]
남편 : 공항에 몇 시에 도착해?
나 : 15시 40분 짐 막 착륙했어.
(-쳇..배웅도 안올거면서 도착시간은 궁금했나 보지?)
남편 : OK.
OK….? 데리러 올 것도 아니면서 오케이는 또 모람…
일본 대기업 상사에서 영업직으로 일하는 남편은 예전 같으면 조퇴나 반차를 써서라도 공항에 나를 데리러 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혼 얘기를 꺼낸 남편은 이전과 완전 다른 사람. 공항에 마중 나올 리가 없다.
친정에서 대만집으로 돌아갈 때는 항상 짐이 많다.
대만에서 구할 수 없는..혹은 비싸게 구해야 하는 한국 물품들… 각종 소스며 친정엄마표 밑반찬과 김치, 아직 대만에 수입되지 않은 한국의 과자 신제품, 면세점에서 산 대용량 화장품 등등…
게다가 엄마는 사위가 뭣 때문에 이렇게 뿔이 나서 이혼얘기를 꺼냈는지는 모르지만..
혹여나 한국 가족들의 마음을 보여주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져서 내 딸과 대화가 잘 풀어나갈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의도가 담긴 사위의 선물도 한가득이다.
엄마는 일 년 내내 덥고 습한 대만에서 사위가 매일 양복 입고 출퇴근하기 얼마나 힘들겠냐면서 한국에서 땀이 금방 마르고 시원한 소재의 바지와 셔츠가 속옷이 나오면 항상 사두신다.
왜 우리 엄마는 결혼 전 딸 옷을 그리 사다가 딸이 결혼하면 사위의 옷까지 사는 건지… 엄마한테 항상 고맙고 미안함 뿐이다.
타이베이(台北)는 또 다르다고 하지만.. 가오슝에서 대만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 정말 깜짝 놀란다.
한국에서는 절대 밖에 입고 나갈 수 없는 색이 바랜, 헤진 옷들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닌다. 그런 환경의 영향인지 남편도 옷에 신경을 안 쓴다.
그리고 이것은 가오슝에서 만난 한국인 아내들의 공통적인 푸념… 늘어난 티셔츠 한 장 버릴라고 하면 아직 입을 수 있는데 왜 버리냐면서 항상 실랑이란다.
남편은 영업직이기 때문에 항상 클라이언트를 만나야 하고, 해외출장도 잦고, 특히 일본과 독일 클라이언트를 담당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더 신경이 쓰인다.
대만사람 같은(?) 인상을 지우기 위하여 나는 아내로서 정말 부단히 노력했다.
항상 깨끗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 코디도 신경 쓰고 나는 결혼 후에 만원이상 하는 티셔츠 사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안 나지만 항상 한국이나 일본에서 세일을 노려 세련되고 깔끔한 비즈니스 옷을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대량 사 오는 것이 나의 미션일 만큼…
이번에도 남편의 선물이라면 선물이 캐리어 하나를 다 채웠다.
여름용 슬랙스바지, 정장양말과 속옷, 그리고 모서리가 다 헤진 비즈니스 백팩이 맘에 걸려 샘소나이트에서 새 백팩도 사 왔다.
예전의 그였다면 분명 속옷 차림에 새 백팩을 메고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보고 집안에서 들뜬 스텝으로 춤을 출 테지만…
이번엔 어떤 반응일지…?
나한테 뿔이 잔뜩 나있지만 그래도 새 백팩을 보고 화가 좀 풀려서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남편은 주중에도 제조업체 클라이언트들과의 접대가 많아 술자리가 많은 직업이다.
주 3회 이상은 접대자리가 있는 거 같고, 하루에 점심부터 시작해 저녁 늦게까지 접대자리가 이어지기도 한다.
횟수로만 따지면 주 7회 이상은 되지 않을까… 거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다 보니… 항상 만성피로에 찌든 직장인.
술에 취해 인사불성을 들어오는 남편은 너무 싫지만, 또 짠하고 안쓰럽다.
오늘도 접대가 있어서 늦게 들어온단다.
몇 개월 만에 만나는 아내가 대만에 왔는데…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그의 공기.
결혼생활 6년 동안 이런 이혼의 고비가 없었을 리 없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정말 용케 대화로 풀어나갔다. 서로 네이티브가 아닌 일본어로.
그렇다. 우리 부부의 공통어는 일본어이다.
어느 한쪽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이렇게 소통이 잘된다고? 할 정도로 우리 부부는 이야기가 정말 잘 통했다.
가치관이 닮아있어서라고 나는 표현하지만…
지금까지도 3번 정도의 이혼위기가 있을 정도의 큰 부부싸움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은 전과 달랐다.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난 결심은 하고 대만에 들어왔다.
해볼 수 있는 데까지 부딪혀볼 거야. 할 수 있은 데까지 노력은 해 봐야지...
왜냐면 나는 남편이 그동안 회사생활, 잦은 접대와 술자리로 심신이 많이 피폐해진 상태라 생각했고 우울증이라고 생각했다.
우울증이라고 하면 분명 본인은 부정할 테지만.
이렇게 피폐해지면 부정적 생각밖에 안들테니…(나의 경험에서 온 생각이다.)
일단 집에 가서 청소하고(아마 집안은 엉망이 되었있을테지..) 그가 좋아하는 저녁밥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자.
이날의 저녁 메뉴는 순두부찌개.
그가 제일 좋아하는 나의 집밥 레퍼토리 중 2위이다. 1위는 명란젓 파스타.
그는 늦게 들어올 것이고 오늘밤에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미리 만들어 놓기엔 파스타는 부적절한 음식이었다.
귀가 후 해야 할 일과 순서와 동선을 생각하면서 무거운 캐리어 두 개를 집어 들고 씩씩하게 혼자 택시를 타고 집을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회색빛으로 우중충하기 짝이 없고 대만에 왔네… 실감이 났다.
집에 도착해서 신용카드를 기사에게 건너니 ONLY 현금이란다…
하.. 젠장.. 내가 대만 관광객인 줄 아나… 나도 여기 산지 6년 됐다. 어디서 개수작을…!!
“나 현금 없어요. 택시도 카드로 지불되잖아요. 예전에 택시 탔을 때도 카드로 계산했는데요?”
대만에 오자마자 난 또 중국어로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인가... 벌써 지치네…
그러자 기사는 자기 택시에는 카드결제기가 없단다. 무조건 현금.
“나 현금 없다니까?”
있는 것만 내란다.
지갑을 탈탈터니 500원이 나왔다.(택시비는 600원정도 나왔다.)
500원 보여주고 “이게 다인데?”
그것만 내란다. 자기가 깎아준다면서.
참내. 이렇게 뜬금없이 선심 쓰듯이 말하는 대만 사람. 정말 기가 차고 짜증이 났다.
뭐 원래 가격보다 조금 내도 된다니 나도 손해 볼 건 없고 더 이상 말싸움으로 힘 빼기도 싫어서(남편이 오면 더한 싸움을 해야 하니 체력을 아껴둬야 한다.)
이렇게 또 하나의 짜증관문을 거쳐 집에 들어왔다.
공항서 택시 타고 집에 오는 거 조차도 뭐 하나 스무스하게 가는 법이 없는 이 나라 대만.
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짐을 정리했다.
바로 냉장고행을 해야 하는 반찬들과 김치를 꺼내 정리해서 부엌으로 들어가니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가 올려져 있었다
설마 이 사람.. 나 없는 동안 자취를 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부엌에서 절대 뭐를 해 먹는 사람이 아니다.
냄비를 열어보니 토마토가 듬성듬성 썰려서 만들어진 수프..? 딱 보기에도 맛없어 보였다.
원래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라 나름 돈 아낀다고 집에서 만들어 먹어 본 건지…
웃음이 났다.
냉장고 문을 여니 편의점에서 산 샐러드, 포장된 게맛살, 쓰고 남은 버터가 들어있었다.
여기서부터 나의 피부전체에 여자의 촉이 자연적으로 솟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한 번도 샐러드 같은 거 사지 않는 그.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어서 게맛살(진짜 게살이 들어있지 않다고 하지만..) 비스무리?한것들은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
그리고.. 버터통에 먹던 버터가 한가득 있는데 굳이 작은 버터를 사서 썼다고?
이것들이 남편이 산 것이 아니라는 본능적인 직감.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와서 내 부엌에서 요리를 한 흔적도 아니다.
시어머니였다면 이미 냉장고에 내가 질색하는 대만 가정요리들로 꽉꽉 차있었을 것이며 저 맛대가리 하나 없어 보이는 토마토 수프가 아니라 당신 아들이 좋아하는 조개 수프나 닭고기 수프를 만들어 놓고 가셨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축하할 일이 생기면 같이 마시자고 일본 출장 중에 사 왔던 모에샹동 로제 샴페인이 없다.
친구들이 집에 와서 요리해 먹고 마셨나?
아니… 그는 지 친구들한테 절대 비싼 술을 대접하지 않는다.
누군가 발을 들인 내 부엌… 찝찝하지만 괜히 남편을 의심하기는 싫었기에 일단 묻고 남편이 돌아오면 물어봐야지…
남편 선물을 거실 한쪽에 모아서 정리해 두고(쨔잔~ 할 생각으로)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청소기 먼지통에 하얀 동물털이 먼지와 함께 섞여있다. 우리 집은 물론 반려동물이 없다.
친구가 강아지를 데리고 이 집에 놀러 왔었나? 하면서 거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소파 위에 쿠션을 정리하고 소파 밑에 청소기 헤드를 넣으려고 한 찰나, 소파 위에 걸쳐져 있는 긴 여자 머리카락.
긴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니 내 머리보다 길고 밝은 갈색에 붉은 기 까지 있는 머리카락.
내 것이 아니다.
바로 청소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지 찾아봤다.
거실 바닥에서 발견한 게 벌써 3가닥.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밑에서도 발견되는 머리카락들. 그리고 화장대 앞.
침실 안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부스 하수구를 봤다.
그렇다. 하수구에 떨어지 긴 머리카락들.
게다가 샤워부스 안이 물기로 젖어있다.
남편은 아침 일찍 출근을 했을 터이니 조금 전 이 안에서 샤워를 한 사람은 그가 아니겠지…
하…그래서 나한테 도착시간을 물어본 거였구나…?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가게 하느라…
마침 엄마한테 보이스톡이 왔다.
그러고 보니 대만에 도착해서 엄마한테 연락도 못했다.
“엄마. 나 이혼할래.”
“왜? 남편이랑 벌써 얘기 다했어?” 엄마는 적잖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가 있는 거 같아. 청소하다가 집에서 여자머리카락이 나왔네?”
그래.. 이때였다.
사랑하는 남편의 아내로 살던 내가 다시 엄마의 딸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