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어떤 영화들 이야기
한국에서 젊은 남녀가 소개팅에 나가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과 처음 만날 때, 흔히 하는 질문이 '영화 좋아하세요?' 또는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최근에 어떤 영화 보셨어요?'가 아닐까 싶다. 요즘은 MBTI가 대세라 'MBTI가 뭔가요?'라는 질문이 먼저 나올 것 같긴 하지만, MBTI가 유행하기 전에는 단연 영화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더 먼저 나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영화는 참 접근하기 쉬운 오락거리다. (코로나19의 유행 이후 한 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그 양상이 바뀌었을 뿐-OTT 서비스의 구독 등-우리나라 사람들의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며, 앞으로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영화관을 즐겨 찾는 편이 아니다. 좋아하는 영화나 관심 있게 본 영화도 남들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소위 천만 영화라고 하는 것들도 잘 안 봤다.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마블이니 DC니 하는 종류의 영화도 잘 모르며(시리즈 초반은 좀 봤는데 결국 전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는 실패했다), 블록버스터급 영화들도 잘 모른다. 그런 영화들에 대해서는 언론매체를 통해 나오는 홍보 기사 정도를 접해서,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언급되는구나, 정도만 짐작할 뿐이다.
영화를 그나마 많이 본 건 고등학교 무렵부터 대학교 재학 시절까지였다. 그것도 당시에 유행하던 영화들보다는 그 전 세대의 영화들, 그러니까 80년대나 90년대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특정 감독들의 영화를 깊게 좋아한 편에 가깝다고 봐야 하나, 그렇다고 그들에 대해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같은 영화를 반복해 보기를 좋아했다. 예를 들면 왕가위나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감독들의 영화. 그들의 영화 몇 편은 정말 횟수를 세지 않고 반복해 볼 수 있는 만큼 보았다. 왕가위의 <화양연화>나 <중경삼림>,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의 토토로>와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것들.
왕가위가 그려내는 홍콩의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화양연화>는 그보다 좀 더 이전 세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각각 배우자가 있는 남녀가, 서로의 배우자끼리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각자 그들의 입장이 되어 연기를 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홍콩의 낡은 아파트 안 비좁은 복도, 서로의 몸이 어쩔 수 없이 가까워질 정도로 좁고 축축한 골목과 계단참, 그곳에서 얽히는 두 남녀의 시선과 현악기의 무겁고 매끈한 선율이 아름답고 세련되다고 생각했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온 몸과 마음으로 발산하는 어지러운 감정을 선명하게 그려낸 영화였다.
그런가 하면 <중경삼림>은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약 삼아 꺼내 먹는 영화다. 크랜베리스의 탁 트인 목소리가 인상적인 영화의 주제곡도 좋고, 무엇보다 주연들의 연기와 이미지가 시원하고 산뜻하다. 왕가위의 영화들은 대체로 서사의 개연성보다는 특정 장면들이 그려내는 섬세한 감정선과 세련미, 감각적인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이 영화는 더욱 그렇다. 임청하와 금성무의 첫 번째 에피소드, 양조위와 왕비의 두 번째 에피소드가 연작처럼 이어지는 짤막한 영화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어딘지 삭막하고 메마른 분위기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엉뚱하고 발랄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특히 양조위의 연기와 분위기는 <화양연화>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 보고 있자면 정말 감탄이 나온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그의 말년 작품보다는 초반 작품들을 더 좋아한다. 특히 <이웃집의 토토로>는 어쩌면 내가 평생 알고 보아온 모든 영화들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단순하고 소박한 스토리라인,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 아름답고 깨끗한 음악 속에 인간이 가져야 할 마땅한 윤리의식에 대한 메시지를 간결하게 담아내어, 무엇 하나 모자람 없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일본의 산업화가 막 시작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가족과 그들의 이웃, 그리고 그들이 우연히 만나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존재-토토로와 그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세계(현실)에 대해 가진 문제의식은, 나 또한 나이를 먹어가고 삶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된 것과 비슷하다. 인류 문명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구와 자연에 진 빚, 여태까지 인류 문명이 겪어온 다양한 혼란과 무질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소박한 움직임들에 대해, 그는 여러 편의 영화를 통해 줄곧 힘주어 말한다. <이웃집의 토토로>는 그 중 가장 대표적이고 간명한, 그래서 더욱 빛나는 영화다. 이 영화에는 그가 생각하는 자연의 위대함과 사랑스러움,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선한 인간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이웃집의 토토로>와 달리 지극히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시공간을 택했다. 대신 주제의식이 <이웃집의 토토로>보다 좀 더 뚜렷하다. 주인공 남자아이가 쇠를 다루는 일을 한다는 설정은 발달하는 인간 문명의 모습을, 주인공 여자아이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설정은 자연이 가진 초월적 힘을 상징한다. 감독은 이들과 이들을 돕는 해적집단이 서로 화합하여,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다른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을 통해, 인간 문명이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외에도 좋아하는 영화들이 툭툭 떠오르지만, 우선 강렬하게 떠오르는 것들부터 두서없이 이야기해 보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영화를 볼 때, 스토리라인의 개연성이나 감독이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만큼이나, 특정한 이미지나 사운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화양연화>에서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택시 뒷자리에 앉아 서로에게 몸을 기대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던 현악기 사운드, <중경삼림>의 두 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주인공의 얼굴이 크고 환하게 클로즈업되던 장면 같은 것이 유난히 자주 생각나는, 그런 식이랄까.
소설이나 시가 독자에게 특정한 이미지나 사운드를 끊임없이 상상해 내는 과정을 요구한다면, 영화는 관객에게 그가 상상한 것이 감독에 의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계속 확인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 감상이나 영화 감상이나 모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지활동이다. 예술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유는, 향유자들끼리 이같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화를 계속 나눌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OTT 서비스의 확대로 영화의 시대가 서둘러 저물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양상이 변화할 뿐 영화의 시대가 벌써 저물어버리기엔, 아직까지 영화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우리 마음에 깊이 남는 단 한 장면 때문에라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