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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1. 2023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매일같이 길고 긴 밤을 보내는 당신에게

에피톤 프로젝트의 싱글 앨범 <불면증>에는, 가수 윤하가 부른 '불면증'이 실려있다. 첫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김없이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나 물 한 모금 마시고서 자야지 했는데.' 깨끗한 목소리가 조용히 읊조리는 이 첫 구절이 너무 좋아서, 이 곡은 윤하가 부른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 되었다. 나는 불면증을 오래 앓아왔다. 실은 지금도 앓고 있다. 물론 몇년 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병원에서 약을 지어 먹어도 동이 틀 때까지 잠이 오지 않은 적도 많았다. 이제는 복용 중인 약이 정말 많이 줄었다. 곧 단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너, 커피덕후라고 하지 않았어? 혹시 여태까지 나의 글들을 죽 읽어오신 분들이 있다면, 내게 그렇게 물으실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참 한심한 사람이다. 의사선생님도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 결국 커피만은 끊지 못했다. 정말 잠이 안 와서 다음날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인 그런 날에는 홍차나 녹차로 바꾸어 마셔보기도 했는데,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차를 마시고도 마음이 안 차서 결국 연하게라도, 디카페인으로라도 커피를 마시고 말았다. 이래서야, 헤비스모커나 애주가들에게 뭐라 할 처지가 못된다. 나도 알고 있다. 나의 한심함.


가족들이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밤, 나도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눕는다. 의사선생님과의 상담 때 권유받은 정신건강 관련 애플리케이션을 재생한다. 처방받은 약은 잠자리에 들기 1시간 전에 이미 물 한잔과 함께 먹었다. 눈을 감고 애플리케이션 속 전문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심호흡을 하세요. 하나, 둘, 셋. 목소리에 따라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심호흡에만, 나의 코와 입, 그리고 내 심호흡에 따라 들썩이는 배와 가슴에만 집중하려 한다. 그래도 자꾸만 생각들이 머릿속을 비집으려 한다. 퇴근 전까지 끝내지 못한 일, 상사나 동료의 무심한 말 몇 마디, 말라비틀어진 통장의 잔고...


결국 눈을 뜬다. 애플리케이션 속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한 프로그램의 재생이 끝나도록 잠에 들지 못한 것이다.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겨 다시 재생한다. 눈을 감는다. 전문가의 목소리에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베개를 바로잡다가, 이불을 고쳐 덮었다가, 심호흡을 한다. 하나, 둘, 셋.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얼마 전 엄마나 동생과 이야기한 잡다한 집안일들이 떠오른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생각난다. 너는 왜 이 모양이니, 정말.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니. 손등으로 눈을 가린다. 고였던 눈물이 흘러 귀를 적신다.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약을 한 알 더 먹는다. 오남용은 위험하지만 다음날 출근을 하려면 정말 어쩔 수가 없다. 몇 시간이라도 자둬야 한다.


이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날 때는 물 대신 술 몇 잔에 약을 삼킨 적도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의사선생님이 신신당부한 것 중 하나는, 실은 커피를 끊는 것이 아니었다. 커피 끊는 것을 견딜 수 없다면 오후 3시 이전까지는 조금 마셔도 된다고 했다. 가장 강하게 당부한 것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었다. 알코올과 수면장애에 복용하는 약은 길항작용을 일으킨다. 내가 워낙 술에 취약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 점만은 분명히 알아두셨으면 한다. 술과 수면장애 치료약을 함께 복용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다.


사실 신경정신과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수면장애를 앓은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인데, 선뜻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아서, 마그네슘이며 테아닌 같은 보조제 복용은 물론이고,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따뜻한 우유나 카페인이 없는 차를 마시고 족욕을 하고, 저녁마다 땀이 흐를 정도의 운동을 하고,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지거나, 내내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일상생활을 하다가 큰 사고를 당할 뻔한 일이 거듭 생기면서, 결국에는 동네 병원을 찾고 말았다. 죄인이 된 것처럼 유리문을 열었을 때, 숨이 턱 막혔다.


대기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온 동네 사람이, 과장을 조금 보태면 심지어 옆동네와 옆옆동네 사람들까지, 전부 이 병원에만 와서 앉아있는 것 같았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간호사 선생님이, 내가 사전예약을 하지 않아 한참 대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정말 한참, 한참 대기한 끝에 겨우 의사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몇 가지 검사를 하고, 결과를 듣고, 약을 받아왔다. 그 후로 나는 3주에 한번 꼴로 병원을 찾았다.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으면 초진을 제외하고는 평균 1~3만원 정도가 든다. 처음에는 약이 잘 듣는 것 같아도, 그 약에 내성이 생기면 또 똑같은 문제로 잠을 자지 못한다. 그러면 의사선생님과 상담하여 약을 바꾼다.


병원을 다니던 초반에는, 병원을 다닌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집에도 숨겼다.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흉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원에 가는 횟수가 늘면서, 병원에 오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는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던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유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그리 흉이 될 만한 일도 아니다. 감기 걸려서 내과나 소아과, 이비인후과를 찾듯이, 수면장애가 있으면 수면장애 클리닉에 가는 것이다. 가볍게 생각하면 된다. 요즘에는 너도 나도 스마트폰을 오래 사용하면서, 잠자리에서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나와 같은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한다.


달리기가 취미가 되고서부터는, 약을 먹고도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는, 동이 틀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켜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 요즘처럼 해가 길어진 여름에는 더욱 좋다. 옷을 갈아입고 러닝벨트를 차고, 가족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와 러닝화 끈을 고쳐 묶는다. 그렇게 새벽 달리기에 익숙해졌고, 어쩌다보니 내가 속한 크루에서 모닝러너로 불리게도 되었다. 내가 가입한 첫 러닝크루가 일요일 이른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 좋았다. 아침이 완연해질 때까지 달릴 수 있는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달릴 마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해졌다. 몸이 아침의 장거리 달리기에 익숙해지면서, 자기 전 먹어야 할 약을 한 알씩 줄일 수 있었다.


이제는 한 알 정도만 먹어도 금방 잠에 든다. 불면증이 힘든 건, 잠에 들기까지의 시간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온갖 부정적이고 불안한 생각들이 머릿속과 마음속을 메우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 밤은 낭만적이고 따뜻하고 편안한 시간이지만, 나같은 이들에게 긴 밤은 고통스럽고 처참한 시간이다. 잠에 들기까지의 시간만 줄일 수 있다면, 문득 잠에서 깨었다가도 다시 천천히 잠드는 것만 할 수 있다면, 불면증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단 잠들기까지의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약의 도움이 가장 컸지만, 달리기의 도움도 무척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지지가, 정말 컸다.


내가 정신과에 다닌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전부 나를 안타까워 해주었다. 나를 탓하거나, 내가 이상하다거나 별나다고 하지 않았다. 그냥 감기에 걸려서 병원 가는 것처럼, 너도 잠깐 아파서 병원에 간 것일 뿐이야, 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게 무척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한다. 당신이 겪는 문제는, 실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겪고 있는 문제일 수 있다고. 혼자서만 괴로움을 안고 있지 말라고. 필요하면 의학의 도움도 받아보라고.


내가 오래도록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불면의 밤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 새벽 어스름이 걷히면 아침이 오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끝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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