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이해하는 데 내가 자주 쓰는 방법이 하나 있다.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라고 묻는 것이다.
스스로 시간을 들여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 책은, 겉으로 드러나는 말투나 태도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내면을 비춘다. 취향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지만, 나도 모르게 어떤 책에 손이 가는지는 숨기기 어렵다. 장르의 선택, 문체의 선호, 그리고 어떠한 문장 앞에 오래 머무는지가 그 사람을 드러낸다.
입사 초기, 커피머신 앞에서 박 과장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는 여행 에세이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작가가 한 도시의 카페를 오래 바라보다가, 아무 사건도 없는 장면을 몇 페이지 동안 묘사하는 대목이 좋다고 했다. 그날 오후 회의에서도 그는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다. 모두가 의견을 굳히려는 순간, 그는 “협업하는 팀들 의견도 더 받아볼게요. 다른 팀이라면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장면 하나하나의 느낌을 중시한다. 정량적인 기준으로 현상을 쪼개기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과 환경, 분위기 같은 맥락이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판단을 미루는 인내가 있다. 책에서 배운 느리고도 세심한 시선이 일에도 그대로 스며 있었다.
또 다른 선배는 늘 경영서와 역사서를 함께 들고 다닌다. 책장 귀퉁이는 접혀 있고, 여백에는 화살표와 작은 기호들이 빼곡하다. 회의에서 그는 차갑게 흐름을 정리한다. 원인과 결과를 나누고, 여러 시나리오를 도식으로 펼쳐낸다. 가끔은 한 문단을 통째로 외워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줄거리를 읊는 게 아니라 현상의 구조를 꿰뚫으려는 습관에 가까웠다. 아마 그가 책을 통해 익힌 건 ‘서사를 구조로 바라보는 태도’일지 모른다. 사건을 늘어놓기보다 흐름을 틀로 잡는 것. 그래서 그의 회의는 건조하지만 방향을 잃지 않는다. 구조를 다루는 독서가 곧 구조를 만드는 방식이 된 것이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단정하고 싶진 않다. 다만 책은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생각을 굳히는지, 어떤 부분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또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천천히 쌓이는 이야기를 즐기고, 인물이 흔들릴 때 함께 마음을 쓰며 긴 호흡으로 따라간다. 에세이나 평론을 즐기는 사람은 장면과 감정, 여운의 결을 오래 음미한다. 과학책을 파고드는 동료는 가설을 세우고 반례를 찾으며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익숙하다. 자기계발서를 붙드는 후배는 왠지 교과서처럼 진지한 인상을 준다.
말하는 방식에서도 힌트가 있다. 줄거리를 정리해 주는 사람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읽은 것이고, 마음에 남은 문장을 외워온 사람은 언어의 결을 느낀 것이다. “그냥 이런 느낌이었어요” 하고 말하는 사람은 감정의 잔향을 좇은 것이다. 읽은 책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만 봐도, 그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엿볼 수 있다.
회사의 언어는 종종 사람을 납작하게 만든다. MBTI 네 글자, 직무 타이틀 몇 자. 그러나 책은 사람을 다시 입체로 복원한다. 회사에서 숫자로 된 보고서만 쓰던 동료가 책상 위에 무라카미 소설을 올려두었다면, 그는 단순히 차갑고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라, 고독과 감수성을 품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평소 무뚝뚝한 상사가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해리포터를 읽고 있다면, 그 속에는 여전히 모험과 환상을 즐길 줄 아는 소년 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다. 직무로는 드러나지 않던 표정, 말투, 습관들이 책을 읽는 손끝에서 살아난다. 책은 회사에서 평평해진 사람을 다시 입체로 되돌린다.
물론 함정도 있다. 가끔 책은 진짜 취향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신분증처럼 전시된다. 사무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꼭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추구하는 이미지’에 맞춰 고른 경우도 많다. 그럴때 나는 질문을 바꾼다. “무슨 책 좋아하세요?”보다 “어떤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셨어요?”라고. 책을 한 번 훑어본 기록보다, 시선이 머문 자취가 더 솔직하다. 멈춘 자리, 밑줄이 그어진 문장, 접힌 모서리의 페이지들. 같은 책이라도 누군가는 한 줄을 오래 붙잡고, 또 다른 이는 단숨에 끝까지 달린다. 진짜 ‘좋아한다’는 건 말이 아니라, 몸이 반응한 순간에서 드러난다.
사람을 책으로 읽는다는 건 판단을 앞당기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쓰고 있는 가면 뒤의 진솔한 얼굴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에 가깝다. 당신은 어떤 플롯에 오래 머무는가. 결말을 사랑하는가, 과정의 진동을 사랑하는가. 서사의 전후 맥락을 중시하는가, 아니면 문장 한 줄 한 줄을 곱씹으며 스며 나오는 단맛을 즐기는가. 우리는 각자의 독서법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그 해석의 습관으로 서로를 대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같은 질문을 꺼낸다. 요즘 어떤 책을 읽으시냐고, 그리고 어떤 부분이 좋았냐고. 큰 고민 없이 흘러나오는 그 답 속에서, 그 사람의 속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말의 온도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나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내가 고른 책들, 내가 붙잡은 문장들을 통해서, 나는 가끔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본모습과 마주한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