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전 직장 상사를 만나 술자리를 같이 했다. 직장을 나와서도 이렇게 만나면 반갑고,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새삼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조직에 있지 않아도 유지되는 관계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 아니니까.
대화는 늘 그렇듯 근황에서 시작했다. 요즘 다니는 회사 이야기, 업계 이야기, 그러다 자연스럽게 예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 이야기로 흘러갔다.
“김 차장, 이 차장, 박 과장 아직도 선배랑 같이 일해요? 지금 회사까지 하면 그때 이후로 벌써 두세 번은 옮기셨잖아요?”
그가 잔을 기울이던 손을 잠깐 멈추더니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 걔네들도 나랑 계속 같이 옮겼지.”
누군가를 따라 직장을 옮긴다는 게 얼마나 큰 결단인지 알기에, 그 선택이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가 대단한 사람인 건 알지만... 그 사람들도 정말 대단하네요. 선배를 엄청 믿는 거잖아요.”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이 묘하게 불편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직장에서의 ‘믿음’, ‘의리’, ‘형님’ 같은 단어들이 사람을 묶어두는 장치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런 이유였던 건 아닐까.
그는 작게 웃었다.
“믿음이라... 그렇게 말하면 멋있긴 하지.”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사람을 너무 순진하게 보는 표현 아닌가.”
“그래도 선배 능력에 대한 신뢰나, 사람으로서의 믿음이 있으니까 따라갔겠죠.”
나는 말을 바로 이었고,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너는 김 차장, 이 차장, 박 과장이 나보다 덜 똑똑해서 나만 믿고 따라다닌다고 생각해? 나는 절대 그렇게 안 봐. 걔네들, 정말 능력 있는 사람들이야. 솔직히 나보다 나을걸?”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말이야.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고, 훨씬 계산적이야. 그래서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머리로든 본능으로든 계산하게 돼 있어. 지금 이 사람을 따르는 선택이 결국 나한테 유리한지 아닌지.”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 계산이 누군가에게는 돈일 수도 있고, 직책일 수도 있지. 근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아냐? 그게 꼭 전부는 아니라는 거야.”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실제로 중요한 건 전체 그림이야. 위기에서 내가 보호받는 사람인지, 아니면 바로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인지. 성과가 났을 때 이름이 불리는 위치인지, 문제가 생겼을 때 정리되는 위치인지.”
말투는 차분했지만 단정했다.
“사람은 결국 그걸 보고 판단해. 아, 이 사람은 나랑 같이 가도 되겠구나.”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선배는 뭘 했기 때문에, 그 분들이 그런 판단을 했다고 보세요?”
“술 마시니까 별 얘기를 다 하네.”
그는 씨익 웃었다.
“내 이익이랑 걔네들 이익이 같을 때는 사실 쉬워. 내가 잘 되면 걔네도 좋고, 걔네가 잘 되면 나도 좋은 상황이니까.”
“그렇죠. 다 같이 잘 되면 되는 거죠.”
“어려운 건 따로 있어. 둘이 충돌할 때야. 그때 사람들은 다 알아. 이 사람이 원칙을 말하는지, 아니면 실제로 선택을 하는지.”
“원칙은 누구나 말로 할 수 있지. 근데 선택은 항상 비용이 들어.”
그는 몇 가지 장면을 덧붙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나서서 책임을 지는 일. 자기보다 다른 동료에게 먼저 성과의 공을 돌리는 일. 위험이 따르는 선택 앞에서, 다른 사람 대신 본인이 감수하는 일. 후배의 성장을 진짜로 고민해보고 조언해주는 일.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지?”
그가 말했다.
“근데 사람들은 그걸 다 보고 있어. 그리고 본능적으로 계산하지.”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사람을 이끈다는 건, 사람을 붙잡아 두는 일이 아니라 불확실한 선택 앞에서도 함께 가도 괜찮겠다고 느끼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확신은 근거 없는 믿음이나 의리 같은 말에서 생기지 않는다. 위기에서의 태도, 불리한 순간의 선택, 그리고 반복해서 드러난 판단의 방향이 시간을 두고 쌓이며 만들어진다.
사람은 계산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더 예민하고, 더 정확하다. 누가 나에게 유리한 판단을 할 사람인지,
누가 결국 자기 쪽을 먼저 챙길 사람인지를 생각보다 빠르게 알아본다. 그래서 사람들이 누군가를 신뢰하게 되는 순간은, 그가 능력을 증명했을 때가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선택과 다른 사람을 위한 선택이 어긋나는 상황에서 어느 쪽을 택했는지를 보았을 때다.
선배는 말했다.
“말은 쉬워. 근데 아무나 못해.”
그건 타고나는 재능도 아니고, 배워서 흉내 낼 수 있는 기술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더 유리한 판단이 분명한 순간에도, 그리고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때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선택을 해온 판단이 시간을 두고 쌓인 결과에 가까워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선택이 반복된 방향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