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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미 Jul 04. 2023

스마트폰 없이 친구와 만날 수 있나요?

일곱 살에게 배우는 낭만 

지난 목요일 아이와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엄마,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 점심에 먹은 도시락, 오후에 마셨던 커피, 사무실 책상을 정리했거나 외근길 날씨가 더워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해준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매일매일의 일상인데, 어린이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게 들어준다. 


"너는 오늘 유치원 재밌었어?" 


어린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전에 했었던 특별활동(외부 수업) 이야기, 오늘 같이 놀았던 친구들, 혼자 놀아서 심심했던 순간, 학원에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얘기했다. 중간중간 '밥은 먹으면서 이야기해야지.'라고 하지 않으면 한참 빈 숟가락을 들고 얘기에 빠져버리기 쉽다. 


"아! 그리고요, 일요일 네 시 삼십 분에 블럭 스쿨에서 수진이를 만나기로 했어요." 


올해 일곱 살이 된 후로 어린이들끼리 잡는 두 번째 약속이었다. 처음 어린이들끼리 약속을 잡았을 때는 나도 처음 있는 일이라 제법 당황해 어린이 혼자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도 합의된 정말 '약속'의 개념인지 먼저 확인했고, 그다음 날 친구와 한번 더 만나는 것이 맞는지 검증의 확인을 했다. 그런 다음 유치원 선생님께 여쭈어 만날 아이 부모님의 연락처를 받아 언제, 어디에서 볼지 어른들끼리 한번 더 확인한 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약속'의 과정을 경험한 어린이가 이번에는 시간과 장소를 친구와 상의해서 구체적으로 정해왔다. 약속의 개념은 알고 있으니 선생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해 내일 내 전화번호를 친구에게 알려주고, 친구에게도 물어 친구 부모님의 연락처를 색종이에 적어와 달라고 부탁했다. 


"엄마 전화번호 알고 있지?" 


"당연하죠!"


아이가 큰 목소리로 내 전화번호를 외웠다. 속으로 '나보다 낫네'라고 생각했다. 친정 엄마의 최근 바뀐 전화번호를 나는 아직 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이에게 유치원에서 전화번호를 묻고 적을 시간이 있냐고 물으니 "오후 간식 먹고 난 다음에 하면 하면 돼요!"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길래 잘하고 오라고 응원해 줬다. 






"수진이 엄마 연락처 알아왔니?" 


다음날 저녁, 하원하는 어린이를 만나 가방 앞주머니부터 열어보며 물어보는데 어린이가 고개를 저었다. 


"뭐? 그럼 연락을 어떻게 해. 못 만나잖아." 


"아니에요. 그냥 블럭스쿨에서 일요일 세시 삼십 분에 만나기로 했어요." 


"어제는 네 시 삼십 분이라며. 확실히 만나는 것 맞아?" 


"진짜예요! 네 시 삼십 분은 너무 늦은 것 같아서 세시 삼십 분에 보기로 했어요." 


내가 몇 번을 되물으니 짜증이 나고 억울했는지 어린이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아차 싶어서 그 뒤에 내뱉을 많은 질문들은 꾹 참았다. 퇴근한 선생님께 연락하기 미안했고 무엇보다 상대방 부모님도 선생님께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거나 따로 내게 연락이 온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일요일 세시 삼십 분에 수진이가 나오지 않더라도 블럭스쿨에서 놀자는 마음으로 그러자고 했다. 


"친구가 안 와서 실망하면 어떡하지."


막 잠이 들려고 하는 남편을 깨우며 걱정스럽게 이야기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있지만, 우리도 어릴 때 그렇게 친구 만났잖아. 낭만 있고 좋구만 뭘." 


남편은 하품을 크게 하고는 옆으로 돌아 누웠다. '우리도 어릴 때 그렇게 친구 만났잖아.'라는 말을 들으니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아파트 놀이터 옆 보라색 시계탑 앞에 서 있는 나. 시계탑 바닥의 커다란 나사를 발 끝으로 건드리기도 하고 시계탑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도 하며 친구를 기다리곤 했었다. 시계를 힐끔 보니 만나기로 한 시간에서 5분이 지나버렸다. 평소에도 잘 늦는 친구라 10분까지 기다려보기로 했고 그래도 나타나지 않으면 아파트 상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빨리 나오라고 재촉할 작정이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동전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달려오며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친구가 보였다.  


"그래 낭만 있네. 진짜."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찾아온 일요일. 아침부터 몇 시냐고, 세시 삼십 분까지는 얼마나 남았는지 계속 묻는 바람에 예정보다 일찍 집을 나서기로 했다. 예쁜 옷을 입고 만나기로 했다며 결혼식이나 가족 행사가 있을 날에 입는 분홍색 드레스를 옷장에서 꺼냈다. 저지하려고 했으나 들떠있는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그렇게 입으라 했다. 


"엄마! 나정이 언니가 준 진주 목걸이 못 봤어?" 


이미 팔에 알록달록한 비즈 팔찌를 하고 다이소에서 산 공주 왕관 머리띠까지 하고 있으면서 사촌 언니에게 받은 플라스틱 진주 목걸이를 찾았다. 


"보물함에서 찾아봐. 거기 있을 거야." 


뚜껑이 달린 종이 계란판에 보석 스티커를 붙인 핸드메이드 보물함 앞을 쪼르르 달려가 목걸이를 꺼내 들고 얼른 목에 걸었다. 신발장 앞 전신 거울에 제 모습을 몇 번이나 비춰보았다. 마무리는 미취학 여자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인 캐치티니핑의 '하츄핑' 양말을 꺼내 신었다. 


아직 친구를 만날 시간은 한참 남아 근처 카페에 가서 어린이는 아이스 초코 라떼를, 나는 차가운 커피를 마셨다. 친구와 만나면 뭘 하고 놀면 좋을지, 친구는 디즈니 중에 어떤 프린세스를 좋아하는지 들떠서 이야기하는 어린이를 보니 친구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점점 커져갔다.


"수진이가 부모님께 얘기 못 했거나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는데 연락을 못 해서 못 올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우리 실망하지 않고 블럭 스쿨에서 재미있게 놀자. 슬라임도 만들고."


평소에는 절대 못 하게 하는 슬라임 혜택까지 내걸었다. 어린이는 친구와 슬라임을 만들 생각에 방방 뛰며 즐거워했다. '아니, 친구가 못 올 수도 있다니까? 엄마 얘기 좀 잘 들어봐.'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어린이는 '응~' 하고 건성으로만 대답할 뿐이었다. 


세시 이십 분. 어린이가 남은 아이스 초코라떼를 단숨에 마시고는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다 마시지 못한 커피를 가지고 다니는 텀블러에 넣고 자꾸만 뛰어가려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내쪽으로 잡아끌었다. 카페에서 블럭스쿨까지는 차로 5분 거리. 주차를 하고 내리니 세시 이십팔 분이었다. 어린이는 차 문을 열기 무섭게 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분홍색 드레스를 휘날리며 뛰어갔다. 블럭스쿨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2층에 있다. 노란색, 주황색으로 꾸며진 계단을 올라간다. 폴짝폴짝 가볍게 계단을 올라가는 어린이 뒤를 무거운 발걸음으로 따라갔다. 샛노란색 키즈카페 문 너머로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요, 빨리!' 손잡이를 잡고 돌려야 하는 문이라 어린이가 쉽게 열 수 없어 내가 대신 열어줬다. 


"수진아, 안녕!"


가게에 있는 온 아이들이 하던 놀이를 멈추고 고개를 들 만큼 어린이가 큰 소리로 친구를 불렀다. 입구가 바로 보이는 테이블에 앉은 수진이네 가족이 보였다. '어머 진짜 왔네!' 수진이 어머님과 아버님이 서로를 보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진이네는 엄마와 아빠, 한 살 어린 남동생까지 온 가족이 함께 오셨다. 아마도 친구가 오지 않으면 실망할 테니 온 가족이 함께 놀자는 그런 마음, 내가 걱정했던 것과 비슷한 마음이리라. 


"이게 진짜 되네요. 아이들이 많이 컸어요."


"네 살 때부터 계속 같은 반이었죠? 얘기는 늘 많이 들었어요. 이제야 인사하네요." 


어린이들은 서로 반가워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이야기하느라 정신없었다. 반갑고 안도하고 기특하고 어쩌면 조금 신기한 이 상황에서 수진이 엄마와 인사를 나눴다. 어린이와 수진이는 네 살 때부터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같이 다녔지만 가끔 유치원 행사에서 잠깐 인사만 할 뿐 따로 만난 적은 처음이었다. 


형제가 없지만 혼자서도 나름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어린이고, 다른 부모님들 보다는 더 잘 놀아주는 '친구 같은' 엄마라는 자부심도 있었는데 친구와 어울려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다정하고 재밌는 엄마라도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같은' 엄마보다는 '친구와 어울릴 수 있게 하는' 엄마가 필요할 때가 되었다. 


"연락처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시간 되시면 가끔 만나요." 


"좋아요. 서로 집도 가까우니 다음엔 집 근처 공원에서 봐요." 


이제 조금 목소리를 낮춰야 할 것 같아,라고 주의를 줘야 할 정도로 어린이는 친구와 신나게 떠들며 함께 하늘색 슬라임을 만들고 있었다. 어린이 덕분에 나도 엄마 친구를 새로 사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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