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들을 수 있다면
“여보, 서늘하다.”
그 한마디에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문 닫자.”
그때 깨달았다. 나는 또다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말을 듣는다는 것은 곧 행동으로 옮긴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건 ‘듣기’가 아니라 ‘판단’이다.
그래서 다음번엔 그냥 들으려 했다.
있는 그대로, 해석 없이.
그런데 금세 다시 시험이 왔다.
“넘어간다.”
이 말의 뜻은 여러 갈래로 열려 있었다.
‘다 먹었다’, ‘아쉽다’, ‘새로 사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중 하나만 고르고 싶었다.
확실한 의미, 단 하나의 답을.
결국 나는 물었다. “사러 가자?”
인간은 언어 속에서 명확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관계는 그 반대편, 모호함 위에 서 있다.
‘서늘하다’는 사실 하나의 온도지만,
그 말의 의도는 열 가지 표정을 가진다.
체온이 내려간 건지, 바람이 드는 건지,
혹은 단지 마음이 조금 쓸쓸해진 건지.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는 척하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어 듣는다.
말이란 상대의 세계를 번역하려는 시도이지만,
그 번역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래서 관계는 늘 오해 위에서 자란다.
하지만 그 오해를 다독이고 웃을 수 있을 때,
그제야 언어는 다시 다리를 놓는다.
아내의 “서늘하다”와 나의 “문 닫자” 사이,
그 짧은 틈 속에서 나는 배운다.
사람은 말보다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