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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Aug 15. 2023

불완전한 소녀

나무인간 57

불완전한 소녀

노미랑의 우화를 읽는 법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내세에 삶에 대한 희망, 혹은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의 어떤 의미를 주어 결국은 삶을 배반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 그리고 이것을 ‘치명적 회피’ 즉 ‘희망’이라고 불렀다.

 치명적 회피는 죽음과 그것에 이르는 공포다. 종교가 완성되기 이전 토템과 샤먼의 의미는 인류에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숙명적 장치이다. 종교 이전 사건에서 우상은 숭배의 대상이다. 여기에 시간성이 더해져 신화가 탄생한다. 플롯의 디테일보다 신화성 그 자체로서의 숭배된, 영원히 죽지 않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런 배경에서 노미랑의 도예는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 그러나 관객은 반드시 조형적 신화가 아니더라도 어떤 경험 때문에 괴기스러우면서 천진난만한 여자아이의 미소 앞에 멈추어 선다. 곧장 동시대적 게토 밖으로 치부된 토템과 샤먼이 뒤섞인 듯한 무채색 우상을 조우하고 의문이 든다. 이 글은 카뮈가 말한 “치명적 회피”이면서 동시에 “희망”으로서 죽음을 초월하려는 오브제에 대한 타자의 의심을 거두는 대에 목적을 둔다.


 기술적으로 인간의 물건(objet)은 중력이 존재하는 어느 표면에서나 온전한 양감을 가진다. 대상의 온전함은 크기, 부피, 무게, 두께 등의 조형성에 제한을 둔다. 문제는 예술가의 오브제다. 예술가는 장인과 전혀 다른 감각으로 조형을 다룬다. 그래서 이따금 예술가의 양감은 위험하고 불완전하다고 여겨진다. 심지어 불쾌하다. 노미랑이 보여주는 질료에 대한 의심과 어색한 완성도 그리고 인물의 왜곡, 축소, 은폐된 신체성이 부자연스러움 그 자체이다. 관객은 기형적이고 유아적 모습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소녀상의 주근깨를 두고 표상의 합목적성을 요청할 수 없다. 그녀의 팔다리는 질량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조금 미성숙한 형태로 한편에 서 있을 뿐이다.

 칸트가 정의한 아름다움이 완벽한 형태와 조형성 즉 인간의 내면을 향한 숭고적 찬양과 고찰이라면, 그것과 대치되는 저 유약하고 순진해 보이는 작은 무채색 덩어리를 통해 투영시킬 수 있는 상(image)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이미지보다 선의지를 염원하는 수행자의 묵묵한 질량일 것이다. 그 질량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주술적 고행은 곧 인지적 불확실성의 산물이며 기시감(déjà vu) 또 다른 자아, 환영이 뒤엉켜 있다. 작가의 이런 태도는 완벽히 불안정과 불완전의 경계에 서 있다. 동시에 작가의 흙덩어리에서 실존을 뛰어넘을 수 없는 불완전한 예술가의 환영이자 부조리한 생이다.

 노미랑의 도예는 현존하는 소멸로부터 도피해 모체로 회귀하려는 전통적 작가주의를 거부한다. 동시에 반드시 소멸할 것을 껴안는다. 이미 자신은 물론 타자의 소멸도 수용한다. 작가의 중력은 타자의 현존이 최대한 지속되고 소멸이 최대한 늦추려 애쓰는 것이다. 작가는 “잘 살고자 하는 바람”을 강조한다. 시지프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잘 산다는 의미는 지나치게 도피적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치명적 회피” 작가는 소명하는 존재에 주어진 인류적 시간을 미루고 “바로 오늘을 잘 살고자 하는 저항” 이른바 “소멸의 유예”인 셈이다.


 또 다른 면으로 흙을 빚고 굽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놀이 성격은 원시적 문화들에 기원을 둔다. 애초 예술가의 작업은 놀이에 가까운 무의식적 행위다. 예술가는 자신의 놀이를 절대화하느라 서양의 지식 전달 방식이 겪은 결정적 패러다임 전환, 곧 신화에서 진리로의 이행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원시적 놀이면서 예술적 노동으로, 사유는 노동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멀어지며 의식화한다.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에서 기술한다. “칸트는 놀이를 노동에 종속시킨다. 노동의 최고 지위는 칸트의 미학에서도 결정적이다. 아름다움 앞에서 인식능력들, 곧 상상력과 지성은 놀이 모드로 작동한다. 아름다움은 주체에게 만족스러우며 쾌감을 일으킨다. 아름다움은 비록 그 자체로 인식을 생산하지는 않지만, 인식 장치들을 즐겁게 해 줌으로써 지원한다. 이를 통해 놀이는 인식의 생산을 촉진한다. 그 자체로 목적인 순수한 바람, 염원, 소망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중략)

 놀이가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순수한 생산에 들어가면 흙은 물건으로, 물건은 작품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흙은 메시지가 아닌 원시적인 기표와 기의만 부유한다. 그녀의 덩어리가 점잖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다시 한병철은 말한다 (중략) “공손함은 형식이 없다. 공손함은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는다. 공손함은 순수하다. 리추얼적 양식은 어떤 도덕적 내용도 품고 있지 않기에 공허하다. 이 공손함은 기호 곧 기표이다. 교환 행위에 ”도식적 형식“이 부과되고, 그 형식이 그 행위로부터 모든 탐욕을 추방한다. 선물은 ”사라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떠돌 듯이“ 남는다. 기의 없는 기표로서의 “선물”은 순수한 매개, 순수한 증여다.” -[리추얼의 종말]

 흙은 순수하다. 공손하다. 점잖다. 그것은 선물이지만 타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기에 아무 의도도 없다. 칸트의 숭고미도 카뮈의 부조리한 신화도 없으며, 호명되지 않아도 실존적 질량을 얻지 않아도 상관없다. 노미랑의 우화는 불안정하고 불완전 의식적(rituale) 희망일 따름이다. 그것이 두 사람(예술가와 관객) 간 교환되는 순간 이미 언급한 카뮈의 말처럼 “내세에 삶에 대한 희망, 혹은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의 어떤 의미를 주어 결국은 삶을 배반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를 전달받는 것이다.   


 나는 노미랑을 한국적 토테미즘의 일부로 규정하고 동시대 해석의 여지를 관객에게 묻는다. 신화나 민담, 우화와 전설 그리고 내세적 바람까지 뒤범벅된 그녀의 질료적 투쟁을 먼저 바라보길 권한다. 감히 노미랑의 작업이 현대미술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순수한 놀이를 노동으로, 은유나 미학적 태도가 아닌 겸손을 말하는 매력을 미술관에서 마주하고 묵과할 수 있을까. 텍스트와의 수수께끼는 관객의 몫이다. 본질적 해체와 전이를 통해 한계와 경계를 허문 미술사를 상기해 보면 이제 미술은 그리고 관객은, 노미랑의 겸손이 여느 유물적 시도보다 동시대적 심미성을 품고 있다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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