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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28. 2023

이양집

나무인간 56

2021 11, 2 ~ 11. 7 영소진 개인전, `이양집`갤러리 아리아(송파구 소재)에 전시된 평문입니다.


<이양집>


예술가에게 데자뷔(deja vu)는 정확히 거리를 측정할 수 없는 시작점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살피는 일, 내가 어디 서 있고- 언제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그 시간만큼 끊임없는 실패를 확인하는 것, 생의 과정 속에서 타자와 나 사이 미적 거리를 매번 새롭게 추정하는 행위이다. 불행히도 지금 나는 그렇지 못하다. 비약이지만 흡사 이런 내 모습이 우주에서 결합에 실패해 궤도를 벗어난 우주선이라면, 그래서 지구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스스로 납득시킬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그 항구적 실패를 망각하기 위해 ‘기억하지 못하는 거리’(distance)로부터 나를 어딘가 재위치 시키는 일은 가능할까?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이 있다. 우리 가족은 그냥 이양집이라고 부른다. 아빠의 고향이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평생이 영면한 곳이다. 그곳에 자주 놀러 갔다. 두 분은 둘째 손녀인 나를 예뻐하셨다. 방학 때마다 언니와 함께 동생들을 이끌고 그 주변을 모험했다. 그곳에서 안전하게 뛰어놀고 사랑받은 경험과 대조적으로 유년 시절 자주 이사 다닌 나에게 이양집은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장소’로 기억 속 자리 잡았다.     

아빠는 더 이상 거기에 아무도 없지만 그곳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동의했다. 가족 중 누구보다도 이양의 생은 훨씬 ‘아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가족에게도 일종의 ‘검은 저택’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얼마 후 아빠는 은퇴하면 이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귀소본능은 언뜻 한국의 가부장에게 당연한 결정권처럼 여겨지지만, 엄밀히 전형적인 죽음의 개인화와 묘지에 대한 부르주아적 전유에 가깝다. 그래서 어쩌면 아빠의 이양집은 푸코가 정의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es)에 가장 근접한 ‘불멸의 건축’이며 더불어 ‘정신의 출발’ 일 것이다. 우리의 상관관계는 그 지정학적 죽음의 위치로부터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코 가족 구성원 일부만의 ‘전통적 걸음’이 아닌 것이다. 다만 그 전유로부터 타자화되어 호되게 시집살이를 한 엄만 그 생각에 손사래를 쳤다.     


 나는 이양집이 보고 싶다. 출산  종종 꿈에 등장한 조부모님 때문이다. 눈을 뜨면 언제나  분의 눈주름이 잔상처럼 남았지만 품엔 당장 데운 분유를 물려야 하는 아이가 울고 있다. 나는 그것이 가족 혹은 작가로서 응당한 심리적 기시감(deja vu) 때문인지 아니면 미시감(jamais vu) 때문인지 혼란스럽다. 둘의 공통점은 망각을 전제하므로 ‘기억의 장애’(disorders of memory) 작동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재라면 아침마다 내게 찾아오는 슬픔은 기록할 만하다. 나는 남보다 조금  길고 오래 슬픔을 품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다. 과거 지향적이라고 치부할  없는 나의 다층적 인식체계에서 빨리 잊거나 조금  슬퍼하려는 노력은 편집 불가능하다. 새삼 출산 전후 가족사를 마주하며 깨달은  가지는 바로 이양집이  교차적 장소라는 이다. 그렇다면 그곳으로부터 앞으로 일어날 죽음의 순환을 심미적 사건으로 다루면서 동시에 친밀한 죽음의 거리도 측정할  있지 않을까. 만약 나의 추론처럼 이양집이 현재  위치를 설명할  있는 역사적 지형지물이자 유일한 풍경이라면, 나는 반드시 ‘(예술가) 위치로부터 이양집까지 거리 재어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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