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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25. 2023

Theory of Artists

나무인간 55

 예술은 사는 일(삶)이다. 이를 위해 집단을 벗어나 스스로를 가두고 실험하는 종은 지구상 인간이 유일하다. 우리가 자주 비교하는 원숭이나 고래에게 일어나는 개체적 소외는 자연계의 이상 징후일 뿐, 인간사회의 성질과 다르다. 이것은 개인이 사회구성원으로서 가능한 정치적 결단이자 다양한 의미의 성장통이다. 예술가와 달리 파놉티콘(Panopticon, Jeremy Bentham)의 사람들은 용기를 거부한다. 온실 속 화초처럼 그들의 구조가 완벽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격하고 인위적인 공간(파놉티콘)에서 인간은 성장하지 못한다. 그들의 유토피아, 파놉티콘에서 자라지 못한 사랑 또한 헤테로토피아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훈련되지 않은 미술가들은 이것이 사회화되는 과정이라고 인식한다. 그들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관객 역시 강제된 어떤 처연함을 들춰내는 불편한 시각을 꺼린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을 애써 듣지 않고 보지 않기에 익숙하다. 예술가들이 모두 솔직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지닌 이야기꾼으로서의 기질과 면모란 이러한 사실을 모르더라도, 자신과 주변에서 벌어진 유사죽음을 연대하려는 이타성을 갖추는 것이다. 그 노력은 시간을 거슬러 저 외부로부터 끊임없는 흘러들어오는 슬픔을 부정하지 않고 애도하려 스스로 희곡(Drama) 임을 자처하는 데 기인한다.


 작가의 행위는 시대의 사회적, 집단적 기억을 기록한다. 어떤 재난이나 사건의 뉴스 이미지가 푼크툼을 통해 여과되는 과정에서 걸러진 자신에게 각인된 모습이 어떤지 목격한다. 이것은 완벽한 무의식이다. 개인의 무의식은 집단의 꿈이다. 작가는 자신의 역사 위를 지나간 타자의 무의식적 흔적을 평면에 반복하여 등장시킬 때마다, 제스처를 통해 보도의 순기능이 지워진 뉴스의 어떠한 시간을 추적한다. 이를 추체험,  사건의 실재조차 사라진 희화적 관습으로만 남긴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건이 혼재된 질서가 드러난다. 어쩌면 유사기억의 흔적만으로 행위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목적은 동시대 살아있는 원시적 주술사나 물성의 세계에서 걷고 있는 좀비(비이성)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말처럼 ‘시각상으로 사고하는 것은 매우 불완전하게만 의식화하는 이며 ‘언어로 사고하는 것보다 무의식적 과정에  가까운것이라면, 오로지 무의식에 가까운 행위를 통한 비이성적 의지가 투영된 화가의 기록은 동시대 우리가 읽어야  (사는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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