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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Oct 12. 2023

시를 그리는 소년 1

나무인간 61

* 2023 서울시립 난지창작스튜디오 도록에 실릴 텍스트의 서문 중 일부입니다.

시를 그리는 소년

시를 그리는 소년


외계(外界)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畫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

었던 것이다     


김경주/ 외계(外界)/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 지성/ 2012    

 



 망설였다. 첫 문장을. 도무지 키보드 누를 용기가 없었다. 후회했다. 괜히 하겠다고 덤볐다. 더 이상 비켜 갈 곳도 없었다. 어렵게 마음먹었다. 그래, 진부해지자. 그렇게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도저히 도망칠 재간이 없었다. 어쩌면 진지한 평론이나 수필보다 열렬한 사모의 편지를 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생각했다. 당장 난관에 부딪쳤다. 사랑하기 시작했는데, 막 사랑에 빠졌는데, 그게 무엇이고 왜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을 설명하려 드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나는 나를 알아야 했다. 그러면 글을 써가는 동안 거대한 석묘(石墓) 같은 그의 시(詩)가 나라는 그림자를 기다릴 것만 같았다. 

 시, 나는 한성우의 그림을 시라고 생각했다. 언어로 이룰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 하지만 무엇보다 소리 내 부르거나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일은 외롭고 두려웠으며 지루했다. 마치 시처럼. 언어는 빗방울 같아 어딘가 얻어맞아야만 소리를 내는데, 그는 마치 아무런 물질에도 닿을 생각이 없는 빗방울 같았다. 부딪치지 않는 오브제는 소리가 없다. 오래전부터 충격과 흔적 없이는 그 무엇도 대상이라 부를 수 없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아름다움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봐줄 누구도 없는 시간 속, 빛과 상관없는 이 세계의 여느 모퉁이에 익명의 빗방울이 하염없이 낙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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