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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영 Jul 16. 2024

바람과 나

김주영

20대 때 일이다. 나는 아는 형 스쿠터 뒤에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형은 오사카 출신 재일교포로 한국에 왔다 갔다 하며 일할 정도로 한국어를 잘했다. 우리는 신설동에 있는 설렁탕 맛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동대문에서 신설동 쪽으로 우회전 할 때 나는 느꼈다. 뒷바퀴에 바람이 없다는 것을... 나는 형에게 큰소리로 “타이어에 바람이 없어!”라고 외쳤다. 형은 들었는지 어쨌는지 계속 운전을 했고 우리는 어찌어찌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알고 보니 형은 "타이어에 바람이 없다"라는 한국식 표현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국어가 능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미묘한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바람 대신 공기라는 단어를 쓴다고 한다. "타이어에 공기가 없어!"라고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셨는데 잠깐씩 집 밖에 나가서 피우고 오시곤 했다. 그럴 때 내가 어머니에게 아버지 어디 계시냐고 물어보면 어머니는 “아버지, 바람 쐬러 나가셨다”라고 했다. 이따금씩 부모님이 수안보 등 멀리 놀러 가실 때도 “바람 쐬러 간다”라고 말하셨다. 얼마 전 책 <임꺽정>에서 "갑갑하니 바람이나 쏘이러 나갑시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었다. 아, 이 말이 조선시대에도 쓰였구나 라고 생각하며 "바람"이라는 말이 바람(wind)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똑똑하고 객관적이라는 챗GPT에게 "바람 쐬다"의 뜻을 물어봤다.


챗GPT는 빠르게 대답했다.


"바람 쐬다"는 한국어 표현으로, 주로 실내에 오래 있거나 답답한 상태에서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기분 전환을 위해 잠시 밖에 나가는 상황에서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너무 답답해서 잠깐 바람 쐬고 올게"라고 말할 수 있다.


역시 똑똑한 챗GPT다.


요즘은 오랜 시간 컴퓨터 일을 하거나 졸릴 때 마당에 나간다. 잡초를 뽑으며 집 주변을 한 바퀴 돈다. 어느 날은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기도 하고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새소리가 들리면 전선에 앉아있는 새를 바라보기도 한다. 햇살도 받고 나면 컨디션이 조금 나아져 있다.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빠른 충전이 된다. 시골에서 쐬는 바람이라 그런지 충전 속도는 초고속급이다.


아내와 말다툼할 때도 마당에 나와 잠시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마음이 진정되고 정돈되면 사과를 하러 다가간다. 심호흡도 심호흡이지만 그저 쐬는 바람은 나를 정화시켜준다. 마치 이 세상에 살다 간 수많은 영혼들이 나를 스쳐가며 더 나아지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바람 쐬다"의 바람은 단순히 공기, 바람(wind)이 아니라 기(energy), 흐름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자연 속의 신비를 바탕으로 바람이라는 단어를 쓴 선조들의 어휘가 놀랍다.


우리 가족은 다섯 명이 한 공간에서 잔다. 다섯 명이 좁은 공간에 모여있다 보면, 조금만 지나도 공기가 답답해진다. 여름철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바람이 통하라고 방문을 열어놓고 잔다. "바람 쐬다"는 환기와 마찬가지로 익숙한 공간,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 생각을 받아들이는 시간인 것 같다.


이제 여름방학, 여름 휴가철이 다가온다. 우리 가족도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 남쪽 바람을 타고 푸른 바닷가로 바람이나 쏘이러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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