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나는 세 아이를 키운다. 모두 다 초등학생이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가족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둘째 아이가 “우리는 셋이라서 얼음땡을 할 수 있어요!“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한 명이 ”얼음!“ 하면 ”땡!“ 하고 치며 풀어주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이 아이들을 잡아야 되는 술래도 있어야 되는 <얼음땡>, 최소한 셋은 되어야 할 수 있는 놀이이다. ‘형제가 셋이라 얼음땡 놀이도 할 수 있구나’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어렸을 때 나는 동네 친구들과 팽이치기, 딱지치기를 하며 놀았다. 두툼한 초록색 끈으로 팽이를 꼭꼭 감아서 휙 던지는 팽이를 즐겨 했고, 딱지치기를 하러 나가기 위해 집에서 미리 딱지를 만들어야 했다. 박카스 등 두꺼운 박스로 접을 때면 펑 소리를 내며 파워가 세서 들뜨곤 했다. 때로는 양면으로 접는 딱지도 열심히 만들었다. 뒤집어서 이긴 딱지를 많이 갖게 되면 부러울 게 없었다. 딱지치기에 열중한 나머지 손가락이 바닥에 닿아 삐기도 했지만 아픈 건 잠시였다. 입으로 ‘음파’하고 부는 동그란 딱지도 곧잘 했다. 또 병뚜껑을 망치로 납작하게 만들어서 놀았다. 병뚜껑에 붙은 비닐을 떼어가며 아주 얇게 만들었는데 바닥에 대고 대장장이처럼 열심히 망치질했던 기억만 날뿐 어떻게 놀았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만 하얀색 델몬트 오렌지주스 병뚜껑이 최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인근 골재상 모래에서 주운 작은 조개로 조개 싸움을 재미있게 했었다. 누런색이 들어간 조개를 “타이거”라고 불렀고 산처럼 튀어나온 조개는 “코브라”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 남동생과 단둘이 놀 때가 많긴 했지만 동네 골목에서 또래들과 주로 어울려 놀았던 시절이었다. 또래 여자아이들은 다리를 높게 올리며 아크로바틱 수준의 고무줄을 하며 놀았다. 오락실도 있긴 했지만 바깥 놀이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나와 30살 차이 나는 첫째 아이의 놀이는 주로 스마트폰 게임이나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등 히어로 영화 주인공 액션을 따라 하는 게 대부분이다. 또래 친구와 만나도 각자 스마트폰을 하거나 티비로 영화를 본다. 평일에는 학교와 집, 학원을 오가며 놀 시간이 없고 주말에 친구들과 방방을 타거나 청소년문화의집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놀이는 짧은 시간 안에 끝난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혼자 책을 읽는다거나 음악을 듣는 등 혼자 즐기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형과 한 살 터울인 둘째 아들은 몸으로 노는 걸 좋아한다. 특히 자전거 타기, 수영, 춤추는 걸 좋아한다. 요즘은 주말이면 친구들과 놀려고 시간 잡기에 바쁘다. 주로 읍내에 있는 친구 집으로 놀러 간다.
아직 어린 막내딸은 엄마 아빠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 인형을 무척 좋아해 인형을 가지고 혼자 잘 논다. 강아지 인형을 데리고 다니다가 재우기도 한다. 자기는 엄마이고 인형은 아기다. 잠잘 때면 여러 인형과 함께 잔다. 마당에서 주로 소꿉놀이를 하고 꽃이나 잎사귀들을 놀잇감으로 삼는다.
아이들 셋이 노는 방식이 다 다르지만 유일하게 나랑 연결되는 지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전래놀이 시간이다. 학교에서도 방과 후 활동에서도 아이들은 전래놀이를 배운다. 아이들은 무척 재미있어하고 아는 놀이도 많다. 둘째 아이는 놀이가 끝났는데도 더 놀고 싶어 운 적도 있다고 한다. 나는 옛날처럼 다 같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내가 즐겨 했던 얼음땡이나 딱지치기를 한다. 내가 즐기던 게 아직 잊히지 않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진심으로 노는 쾌감을 아이들도 알겠지?
아이들을 보며 내 유년 시절을 되새겨본다. 동생과 함께 놀이터에서 시소, 그네를 타고 미끄럼틀을 탄 기억이 난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던 여름방학이었던 것 같다. 얼음! 하고 외치고 그 순간에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서로 ‘땡’하러 달려와주려나, 마법처럼 아이들은 자라고 시간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