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미용실에 들어섰다.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온다. 사장님께서 소파에 앉아 흥겹게 스틱을 두드리신다. 난타 연습을 하시나 보다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사장님은 가끔 난타 공연에 나가신다.) 알고 보니 얼마 전부터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연세도 꽤 있으신데 대단한 열정이다. 미용실 보자기를 둘러주며 사장님은 지금처럼만 살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손주가 태어나면 봐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며 자신에게 집중하며 지내는 일상이 퍽 좋으신가 보다.
비슷한 시기 또 다른 이웃에게도 “지금이 좋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자녀는 이미 성인이 되어 독립한 지 오래다. 지금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개와 산책도 하며 적당히 여유 있는 시기를 즐기는 듯 보였다.
또 다른 분은 칠순을 넘으셨고 세 아들을 키우신 분이다. 서울에서 오래 살다가 괴산에 내려와 노후생활을 보내고 계신다. 한겨울에는 서울 집에서 지내신다고 한다. 지금이 그분 인생 최대의 행복기, 최고의 안식기, 휴식기라고 한다. 나이 듦이 좋고 인생 황혼이 좋은 ‘지금 행복한 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분 역시 앞이 잘 보이지 않은 시기를 묵묵히 거쳐오신 분이다.
이 세분에게는 자녀가 다 자라서 곁에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평안을 맞이할 수 있는 걸까? 반면에 나의 현실은 여전히 육아 전쟁 중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뭐 뭐 하지 마!”로 시작해 잠잘 때 “뭐 뭐 하지 마!”로 끝난다. 언제 어디서 포탄이 떨어질지 모른다. 다섯 식구가 복닥복닥 부대끼며 살다 보니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기도 한다. 그나마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이 평안한 시간이다. 아이들이 꼬마 시절은 벗어나서 훨씬 수월해졌지만 태평양 저 멀리서 사춘기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어머니도 지금처럼만 살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7년 전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기 직전에 말이다. 나와 동생 둘 다 결혼하고 두 분이 여행도 다니시며 잘 살고 계셨다. 아버지는 버스 운전을 하셨는데 며칠째 과로를 하셨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쓰러지셨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누워계셨다가 상태가 안 좋아 병원으로 가셨다. 뇌경색이었다. 뇌경색은 서둘러 병원에 가야 하는 시간 싸움인데 뇌 손상이 많이 진행되었다. 다행히 반신불수가 되신 건 아니었지만 방향감각을 잃게 되어 혼자 길을 찾지 못하신다. 인지능력도 전보다 떨어지셨다. 누구보다 건강을 자부하던 분이었는데 그 절망감은 나로서 상상할 수가 없다.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 계셨을지도 모른다. 화장실에서 아버지가 흐느껴 우신 적이 있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을 때는 먹먹했다.(할머니 돌아가실 때 빼고는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자신의 짧은 평안을 뒤로하고 아이돌보미로 생활전선에 뛰어드셨다. 면접관이 어떻게 지원하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 사정을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아이들도 돌보고 평생 동반자인 아버지도 돌보는 삶을 시작했다.
“소확행(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1986)에서 사용된 말이다. 소확행은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나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 어쩌면 인생에서 행복의 순간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말일 수도 있겠다.
어제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요양보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다. 점점 나이 드는 아버지를 돌보며 사실 생각으로 따신 것이다. 무척 기뻐 아들에게도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를 하셨다. 16년 전 어머니와 함께 독일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 궁전을 방문한 적이 있다. 상수시(Sanssouci)는 프랑스어로 ‘근심 없는’이라는 뜻이다. 정원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머니는 생전 처음 보는 유럽여행에 생기가 가득해 보였다. 상수시 궁전을 방문했을 때처럼 어머니께서 근심 걱정 없고 평안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