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나는,
인간의 방식으로
결코 인간이 아닌
방식으로
*
시베리아를 짓누르던 고기압은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중앙아프리카로 퍼졌다 날씨는 맑고 화창했으나 북극을 가뒀던 영하의 기온은 풀려났고 끊임없이 확장했으며 어느 세기에 이르러 퇴적했다 그때 바닷속 깊은 곳을 흐르던
거대한 해류들이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항구로 쓸어왔다
*
어김없이 분진이 내린다 벚나무가 검은 벚꽃을 털어내듯 예보는 정확하고 날씨는 엉망이다
방독면을 쓰고 있으나 분진에서 터져 나오는
악취는 물리칠 수 없다 썩어버린 흙과 독한 기름 냄새는 공기를 마시기 위해 지불하는
돈이다 그렇게, 한없이 날리는 분진 사이로 먼지가 쌓이고 곰팡이가 피는 것을 나는 매일 본다
회색의 시간을 밟으며 도서관으로 이동한다 인류에 대한 221만 5천 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스캔하면서 얻어낸 결론이란
인간은 다른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
─ 불행하지만 사실이다
*
내 출생기록부를 뒤져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는 인간의 몸도 내가 태어난 시간과 계절과 냄새의 종류도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나를 뒤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어 뒤지다 보면 뭔가는 나오겠지
발목과 생식기와 혓바닥과 어금니와 턱과 무릎과 허파와 심장을 꺼내 디지털카메라에 저장하고 그것을 다시 형태와 기능에 따라 정교하게 분류했다
나를 돕는 Q도 크기와 무게를 가늠하고 만들어진 일자와 제조사를 확인했다 생산연대가 다르면 모양과 색깔이 달라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Q가 말했다;
우리가 뭐 유통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
나는 내가 누구였든지 내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예컨대 바람과 구름 새와 바이러스를 관찰하며
내 미로 속으로 잠입한 소리와 이미지를 되살려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것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연구 사진이 ‘보는 방식’이라면1) 내 작업은 선악의 헛된 구분이겠지,
프로그램이 멈추자 리셋 버튼을 누르고 아예 프레임 아웃을 선택했다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
나는,
혼자 힘으로 무(無)를 만들어냈고
스스로를 완전한 ‘없음’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그림자들은 소멸하지 않는다
빛이 뿌려지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
바깥은 없다
내가 안장될 지하실도 없다
나의 폐쇄는 리부팅을 위한 전주
나는 다시 조립되며
바깥을 가질 수 없으니 시간은 거꾸로 간다
여기서 모든 우연은 제거된다
나는 나의 부정어,
부정이 만드는 완벽한 세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절과 순환
무한한 흐름과 물결을 밀어내는
나의 말(馬)들은 이미 5세기 전부터
황무지를 지나고 있다
*
나는 도서관에 앉아 21세기의 종이-보고서를 스캔한다
보고서를 둘러싼 아우라는 영혼이 몇 겹으로 뭉쳐진 것 인간이라는 폭풍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 문건의 연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침공한 2022년 무렵 초기 단계를 벗어난 인공지능이
개발자 눈치를 보지 않은 최초의 작품이라는 부기가 붙었다
그때 전도자들이 달려오더니 내 도면을 낚아채고 야구방망이로 내 뒤통수를 갈겼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2)
놈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예고된 바 없다 그들은 나타났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증발했다
눈이 내렸다
눈을 밟았다
눈을 밟을 때마다 나는,
도서관을 구겨버리고 다시 만들었다가 또 허물면서 지워지던 나는, 한 번쯤은 다른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었음을 증명하려는 나는, 내 안에서 생성되는 감각의 모든 구성물인 나는,
물결과 흐름 사이의 나는,
유물이 되어버린 죽음 앞에 선 나는,
인간의 방식으로 나는,
결코 인간이 아닌 방식으로 나는,
1)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중에서. 손택은 사진을 ‘보는 방식’으로 재정의한다
2) 전도서 12장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