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날

2023.10.12. 목

by 고주

고3 마지막 전국연합학력평가 보는 날


고생하세요. 파이팅.

문 앞까지 나와 주먹을 불끈 쥐는 아내.

돈 벌어오라는 말인지, 집에만 없어도 좋다는 말인지.

둘 다일까?


TBN 교통방송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통통 튄다.

가늘게 떠는 자두의 목소리로 듣는 ‘김밥’이 이렇게 슬펐나?

밥알이 김에 달라붙는 것처럼 영원히 붙어 있겠다잖아.

언젠가 비가 오던 소풍날 내가 만 김치김밥을 맛있게 먹어주던 녀석들이 떠오른다.

앞차와 간격을 멀찍하게 두고 가는데, 언뜻 거울에 비치는 뒤 차.

금방이라도 내 똥구멍에 코를 박을 참이다.

자신 있게 누른 비밀번호.

007 빵#이라고 했겠다.

007*#을 몇 번이고 눌러도 다르다네.

뻘쭘하게 서서 지나쳐가는 아이들의 시선을 항아리로 받는다.

뭐라도 하는 척해야겠다.

마지막으로 0070#. 띠링.

진짜 빵이었어.

박래홍 선생님의 수필집 ‘시공을 떠돌다 간 바람’

‘광주문학 2003년 가을호’를 본다.

속이 깎이는 고통을 체면과 바꿀 수 없다, 사정해도 커피는 먹지 말아야지.

간지러운 서울 말씨들이 얽히고설킨다.

면접 때 나보고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곧 들통난다고 했었지.

일단 입에 자크를 채우자.

설익은 밤 벌어지듯이 쪼개지면 큰일이다.

11 계단을 걸음마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천천히 올라 왼쪽으로 360도 회전.

다시 11 계단.

그러면 한 층이다.

2층 본 교무실에서 5층까지 66 계단을 올라 3학년 3반 교실에 닿는다.

짧은 머리에 수수한 재킷을 걸친 여인이 내 이름을 부른다.

시험감독이 끝나고 교장실에서 뵙자 하신다.

내가 뭘 잘못했나 쪼그라지는 뭣.

시험지를 전달해 준 선생님이 베테랑이시라고 전해 들었다고 했다.

10년도 훨씬 지난 고등학교 시절인데, 얼어 죽을 베테랑.

시험 때라 교실이 양계장 닭처럼 아이들로 빽빽하다.

교탁 앞에 서서 초점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교실 뒤편을 쳐다본다.

빵빵해진 풍선에 계속 바람을 불어넣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닭살 돋듯이 올라온다.

여기에 신공 하나 추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눈썹달만큼 입술을 벌렸다, 힘없이 닫는다.

완전 살얼음판 저수지 걷는 것이지.

노란 봉투에서 테이프가 뜯기는 소리.

학생들 책상 왼편에 답안지를 올려놓는다.

이름을 쓰고 수험번호를 쓰고 학교 번호를 쓰고....

문제지를 나누어준다.

땡 소리와 함께 후다닥 넘기는 시험지.

화법과 작문(35번~45번)부터 풀기 시작한다.

15분 만에 무거운 돌덩어리를 팔에 누인 놈. 담요는 왜 덮느냐고.

눈을 감으면 바다가 자장노래를 불러주나 보다.

이제는 프라이팬 위의 고등어처럼 뒤집는다.

안경은 또 왜 벗었느냐고.

교탁 위 앞 벽엔 상해에서 독립운동할 때 썼던 누룽지처럼 놀짱하게 변색된 태극기가 걸려있다.

1997년에 개교했다.

처음에는 문제아들이 많아 생활지도에 무척 힘들어했다.

2011년에 부임한 교장 선생님이 학력 신장에 몰두하셨다.

선생님들의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무소의 뿔처럼 시스템을 잘 구축하셨다.

전공비전멥 프로그램이 입학사정관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주변에 아파트들이 들어서며 교육여건이 좋아 광명에서는 손꼽히는 명문 학교가 되었다고 뿌듯해하신다.

오랫동안 수업을 하지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수업하실 용기가 났느냐며 놀라신다.

좀 특별한 경우인가?

내가 원래 교사였지, 교장이었나.

담임도 좋고 청소 감독도 좋으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면접 때의 말을

꺼내신다.

말로 생색내기 참 쉽네.

동네 형 같은 교장 선생님이시다.


행정실로 가서 시간강사 채용계약서를 쓴다.

석사라 최고의 금액이라며 시간당 24,000원.

소득세는 원천징수 한다나.

음주운전을 하면 바로 계약 해지라고.

다 읽어보지도 않고 사인을 했다.

순대와 머리 고기에 얼큰한 들깨 육수가 넘실넘실.

김치에 계란찜. 새우 맛살 샐러드.

혼자서도 잘 먹어요.

국그릇이 따로 있으면 좋을 텐데.

수저로 국 한 그릇 다 먹기는 마라톤 풀 코스 뛰는 것이다.

팔에 알통 생기겠다.

영어 듣기는 서울이라 버터를 더 바른 건가?

초보 스케이터가 얼음판 위에 서 있듯 미끄러진다.

저 녀석들 다 알고 답을 쓰나?


5교시 시험감독이 끝나고 교무실에 들렀더니, 가시란다.

수업 빼고는 돈 챙겨줄 수 없으니 곤란하게 하지 말고 빨리 가주시라는 눈치다.

있어 봐야 부담이겠지.

편하게 생활하라는 선생님들의 배려.

새롭게 시작하는 사회생활 너무 나대지 말자.

학교 옆 천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다음은 저곳을 뒤져야겠다.

라디오 버튼만 누르면서 왜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며 땀을 뻘뻘 흘린다.

자주 하는 운전이 아니기도 하지만, 기계는 잼뱅이인 영태다.

어렵다.


자두 – 김밥


몇십 년 동안 서로 달리 살아온 우리

달라도 한참 달라, 너무 피곤해

영화도 나는 멜로, 너는 액션

난 피자, 너는 순두부

그래도 우린 하나 통한 게 있어, 김밥

김밥을 좋아하잖아

언제나 김과 밥은 붙어 산다고

너무나 부러워했지

잘 말아줘, 잘 눌러줘

밥알이 김에 달라붙는 것처럼

너에게 붙어 있을래

날 안아줘, 날 안아줘

옆구리 터져버린 저 김밥처럼

내 가슴 터질 때까지


예전에 김밥 속에 단무지 하나, 요새

김치에 치즈, 참치가

세상이 변하니까 김밥도 변해

우리의 사랑도 변해


잘 말아줘, 잘 눌러줘

밥알이 김에 달라붙는 것처럼

너에게 붙어 있을래

날 안아줘, 날 안아줘

옆구리 터져버린 저 김밥처럼

내 가슴 터지게 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세상이 우릴 갈라놓을 때까지

영원히 사랑할 거야

끝까지 붙어 있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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