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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선 Sep 26. 2024

 시명상/바람의 그림자/정현종

바람의 그림자/정현종

 

창밖을 본다.

바람이 불고 있다.

 

한참 있다가 또 내다본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흔들리는 나뭇가지

흔들리는 이파리들.

 

어른거리는 시간의 얼굴

바람의 움직임을 깊게 한다.

그림자들

어른거려

바람의 움직임은 깊다.

 

슬픔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움직인다.

바람의 그림자.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

 

 

오늘 새벽에 함께 읽은 시입니다. 가볍게 읽고 지나가려 했는데 몇 번을 되풀이해 읽는 동안 붙잡혔습니다. 

바람에 무슨 그림자가 있을까요? 바람에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압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바람은 무언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바람의 다른 속성을 생각해봅니다. 바람의 속성은 움직임입니다. 우리가 바람이라고 느끼는 것은 사실은 공기입니다. 바람은 그리스인과 인도인이 말한 4대 요소(물, 불, 흙, 공기) 중의 하나인 공기인 것이지요.

바람은 혼자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지요. 어디선가 열이 있었을까요? 무언가 따뜻한 것이 올라와 공기를 가볍게 했을까요. 혹은 물이 공기대신 자리를 차지했을까요. 

 

화자는 문득 밖을 내다봅니다.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불고 있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바람이 무언가를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나무입니다. 나무 이파리가 흔들리고 나뭇가지가 흔들리기 때문에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나뭇가지가 흔들리기 때문에 그림자도 흔들립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빛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피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구건 세상에 태어나 빛을 받고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면서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결국 나무는 나 자신입니다. 나무는 우리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자는 깊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을 겪어내므로 나를 통과하는 그림자도 깊어지는 것이지요. 

 

내게 오는 사건은 나의 생각을 거쳐 그림자를 만들어냅니다. 내게 오는 사건은 나의 감정을 거쳐 흔들림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기에 바람의 그림자는 슬픔입니다. 생의 본질은 슬픔이니까요.  그렇기에 우리는 그토록 행복해지려고 애쓰지요. 아니 슬픔의 그림자는 바람입니다.

이 시에 붙들린 것은 마침 바람이 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요하기만 하던 제 삶이 흔들렸고 그로 인해 제 안에 있던 그림자를 다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흔들립니다. 누구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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