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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선 Oct 04. 2024

 시명상/두 번은 없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가장 밑바닥의 진실, 두 번 살지는 않는다는 것



두 번은 없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은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렸을 때,

내게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



시가 때로 무한한 위로를 주는 것은 그 시가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알고 있지만 눈앞의 이익을 좇느라 바빠서 잊어버린 진실들이지요. 아니 일상을 사느라 바빠 우리의 근간을 이루는 밑바닥의 진실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사는 것처럼 살고 있을 겁니다. 영원이란 무한한 시간, 되풀이되고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 시간이지요. 물론 우리가 되풀이해야 할 것들은 많습니다. 몸 안에 새겨 넣고 마음에 박아 넣음으로써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되풀이해야지요. 그렇지만 삶을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시야는 좁아서 그날 하루도 보지 못합니다. 한 시간 이후도 보지 못하지요. 심지어 잠시 뒤까지도요.



시는 그때 다가와서 우리를 후려칩니다. 아니 아니, 번뜩 정신이 들게 합니다. 쉼보르스카의 이 시는 얼마나 하찮은 그러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진실들을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지요.



아마도 가장 와닿는 구절은 다음 구절일 겁니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사회는 우리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마치 이 사회라는 유기체가 영원히 존속할 것처럼, 인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인 것처럼 이야기하지요. 지금의 이 가치관이 전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말합니다. 부귀영화, 명성과 부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요. 너는 바보라고. 네게는 돈이 없으니, 네게는 명성이 없으니 뒤떨어진 너는 바보라고요. 


최근에 만난 이가 한 말이 그러했습니다. 세상에 돈이 없으면 어떻게 살 거냐고. 특히 노후에 돈이 없으면 거지라고. 물론 그가 말하는 돈은 그저 먹고 살 정도가 아니었지요. 최신 골프웨어를 입고 가장 비싼 차를 모는 그에게는 돈의 단위가 생계를 이을 정도가 아닌,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정도라야 했습니다. 그 욕망에는 끝이 없지요. 몇 억 원을 수수료로 받았고 전국에 지부가 있어 늘 바쁘다는 그는 여전히 현장에서 뛰고 있었으니까요. 


 그의 시각은 정확히 이 사회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가치관이지요. 놀랍지는 않았지만 두근거렸습니다. 꿈을 말하는 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 결국은 돈이었으니까요. 그는 화려한 이가 아닌 재능이 있는 이를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의 눈에 저는 그야말로 낙제생이었을 거라고 짐작했던 이유입니다. 그뿐만이 아닌 수많은 이가 그의 시각에 동의할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요. 가치를 매기는 기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사는 생에서 낙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나의 삶에서 기준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에서 나는 단 한 사람입니다. 다른 누가 내 삶으로 들어올 수도 없고 나 대신 살 수도 없지요. 세뇌 혹은 조정이라는 표현이 있는 이유는 바로 내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의 의식에 어떤 생각 혹은 이념을 집어넣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도록 만든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내 삶은 내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의 생에서 기준은 나, 낙제란 있을 수 없지요.


우리가 또 하나 잊고 있는 사실은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겨난 이래 철학자들은 시간이라는 문제를 풀려고 무수히 노력해왔지요. 아무도 그 문제를 풀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시간은 왜 존재하는지. 왜 흐르는지 그에 대한 답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답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니까요.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가니까요. 그러나 시간이라니요. 변화라니요.


 동일한 사건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똑같은 꽃이라 해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동일한 책이라고 해도 오늘과 내일이 다릅니다. 내가 변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물론 나도 다르고 너도 다릅니다. 내가 너를 동일하다고 여기는 것은 너라는 어떤 특성이 너를 동일하다고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너를 느꼈을 때 그것은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한 것은 네가 한 송이 장미이기 때문입니다. 그 장미는 지금 현재의 장미이지만 일초 지난 뒤 장미는 또 다른 장미입니다. 그러므로 장미는 장미지만 각기 다른 장미지요. 끊임없이 변하는. 달라진 너는 장미인가요 돌인가요. 아까는 꽃이었지만 지금은 돌인가요. 


 너의 변화는 네가 힘겨운 시간을 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힘겨운 일이 영원토록 지속할 것처럼 느끼지요. 순간을 지나는 일이 너무도 힘들다고 여기지요. 그러므로 내가 보는 너는 동일하되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는걸요.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성숙할 수가 있을까요.


 힘겨움은 변화를 깨닫기에 좋은 기회입니다. 힘겨움은 교훈을 얻기에 좋은 시련이지요. 그 모든 것을 거쳐 지나온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존재하기에 힘겨움을 겪고 존재하기에 아름답고 존재하기에 사라지는 것이라고. 무언가를 해낸 네 삶에서 낙제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꿈을 실천에 옮겨 너다움을 실행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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